빈 잔
박현숙 (문학심리치료학박사·진주심리상담센터 대표)
빈 잔
박현숙 (문학심리치료학박사·진주심리상담센터 대표)
  • 경남일보
  • 승인 2016.12.22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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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숙

비워 있는 유리컵에 토마토주스를 따른다. 색깔이 참 곱다. 단숨에 들이켜고는 이내 컵을 씻는다. 다시 유리잔이 투명하다. 일단 채워진 잔은 더 이상 다른 용도로는 사용할 수 없다. 그리고 한번 사용한 잔은 반드시 씻어야만 다시 사용할 수 있다. 컵을 씻다가 불현듯 내 삶도 비워진 컵처럼 씻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고 보니 싱크대 위에 놓인 세간살이 중 컵이 유난히 많다. 필요하면 채우고, 씻고, 그리고 지금은 비워져 있는 잔을 바라본다. 나의 삶도 마치 비어 있는 잔처럼 매순간 새롭게 맞이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싶다. 더 이상 과거로부터 축적된 영향들이 나와 실제 사이에서 장애물이 되지 못하게 하고 싶다. 아니 스스로를 속이는 변명 따위로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게으름이야말로 여태껏 나의 잔을 비우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를 일이다.

직업상 문제해결을 호소하는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잦다. 내가 만나는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자신들의 생각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데, 생각들이 너무 가득 차서 정서가 아예 경직돼 있는 이들도 더러 있다. 당연히 그들은 인간관계로 인해 빚어지는 일들로 힘들어 한다. 소통과 공감능력이 상실돼 갈 때 우리는 병들어 간다. 그리고 그 병이 깊어질수록 고통은 전염돼 가까운 이들도 힘들게 된다. 자신의 잣대로 세상과 상대방을 해석하다보니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스스로 만든 틀에 갇혀 괴로워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종종 나의 모습을 볼 때도 더러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오랜 기간에 걸쳐 같은 선택을 반복하게 되는, 이것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습관이 돼버린 내 영혼의 찌꺼기는 없는가. 혹 아직도 씻지 않은 채, 혹은 가득 찬 컵으로 세상을 향하여 또 다른 무언가를 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본다.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이 사실이 오늘따라 나에게 위안이 된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래 지금이라도 비우자.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마음으로 이것도 담아보고 저것도 담아보고, 이것도 마셔보고 저것도 마셔보자. 그리고 다시금 깨끗하게 씻은 빈 잔이 되자. 우리의 삶에도 이런 유연성이 필요하다. 특히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하다. 마치 컵이 비어있을 때만 쓸모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박현숙 (문학심리치료학박사·진주심리상담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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