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칼럼] 의령 한지
최창민 (취재부장)
[현장칼럼] 의령 한지
최창민 (취재부장)
  • 최창민
  • 승인 2016.12.27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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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품에 안긴 화엄사는 통일신라 때 연기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여느 절과 달리 각황전과 대웅전 두개의 주 불전을 모시고 있는 독특한 구조다. 이렇게 된 데는 후삼국의 정치적 배경과 무관치 않다. 당시 왕건과 견훤으로 양분하던 세력판도에서 화엄사는 견훤쪽에 섰는데 정작 권력은 왕건이 쥐고 말았다. 승자의 의중에 따라 대웅전을 건축하지만 기존 각황전을 철거하지 않아 결국 두개의 주 불전이 탄생한 것이다. 이 절에는 각황전을 포함해 석등, 사사자삼층석탑 등 무려 4개의 국보와 8개의 보물을 소장하고 있다. 각황전 앞에는 ‘서오층석탑’이라는 게 있다. 이 탑은 불교경전을 새긴 서지를 1300년 동안이나 품고 있었다.

때는 1995년, 보수를 위해 이 탑을 해체했는데 탑신에서 사리장엄구 등 유물 330점이 나왔다.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누런 빛을 띤 두루마리.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필사한 서지였는데 절과 국가의 안위를 비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이 종이는 1300년전 신라인들이 만든 것이었다. 1966년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인쇄본과 같은 재질인 닥나무로 만든 한지였다. 이 얇은 종이가 기나긴 세월의 강을 건너 어떻게 이 시대에 부활할 수 있었을까. 비밀은 닥나무로 만든 한지의 우수성에 있었다. 당시 문화재 관계자들은 실로 경탄을 금치 못했다.

우리고장에 닥나무로 한지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몇 있다. 남해 화방사 스님들이 산기슭 산닥나무를 채취해 한지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의령에도 신라 때부터 구전된 닥나무와 한지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대동사 주지가 자생 닥나무를 잘라 지팡이로 사용했는데 껍질이 벗겨지면서 막을 형성하는 것에 착안, 종이를 만든 것이 한지의 시초라는 것이다. 배도식 작가가 의령읍지를 바탕으로 ‘한국민속의 현장’이라는 책에 기술한 내용이다. 신라 때부터 닥나무를 이용한 우리의 독자적인 종이제조법이 있었음을 추측케 하는 대목이다.

얼마 전 의령군의 신현세 장인이 이탈리아 문화부 산하 도서병리학연구소로부터 문화재 복원에 관한 인증서를 받았다. 장인이 만든 전통한지가 이탈리아의 보물 ‘카르툴라’의 손상부분을 완벽하게 복원해 원형을 되살린 재질로 호평을 받았기 때문. 카르툴라는 800년 전 가톨릭 성인 성 프란치스코의 친필 기도문을 담은 귀한 유물이다. 한지가 해외 공인기관으로부터 문화재 복원 용도로 인증을 받은 것은 사상 처음이다. 세계적 권위의 복원기관이 의령 한지의 우수성을 인정했다는 의미다.

그동안 한지는 내구성 통기성 등에서 세계 최고임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이를 인정받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이번에 신 장인이 인증서를 받은 것은 한지의 재발견이면서 당연한 결과다. 이를테면 1300년 전 선조들의 과학적인 한지 제조법이 우리의 인쇄·기록문화를 발전시켜온 원동력임을 확신하게 된다. 또 이의 발달은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IT국가로 거듭날 수 있는 밑거름이었다는 생각까지 미친다. 일찍이 조상들의 혜안에서 탄생한 한지의 세계화에 신호탄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최창민 (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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