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의 시간여행
‘12월에 걷기 좋은 여행길 10선’(한국관광공사 주관)에 뽑힌 전북 군산시의 구불길 가운데 ‘탁류길’, 작가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 이름을 따온 힐링길이다. 탁류길은 소설 ‘탁류’의 작품배경이 된 군산의 원도심을 중심으로 이어져 있고,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수난사와 1930년대의 흔적을 그대로 돌아볼 수 있는 길이다. 국민체력센터(원장 이준기) 명품 걷기클럽인 ‘건강 하나 행복 둘’ 회원들과 함께 트레킹을 떠났다. 군산 구불길은 모두 11개 코스로 이뤄져 있는데, 그 중 탁류길은 6km 정도 되는 코스로 공간 트레킹만 한다면 1시간 조금 더 걸리지만, 시간여행을 떠난다면 12시간도 오히려 부족하다. 우리는 4시간 동안 걷기를 겸해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했다.
‘역사는 미래가 된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2011년에 개관한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먼저 박물관 바깥에 살아있는 역사부터 보기로 했다. 근대역사박물관을 조금 지나자 1908년에 세웠다는 옛 군산세관이 눈길을 끌었다. 독일인이 설계해 유럽식으로 지은 이 건물은 한국은행 본점과 비슷한 양식이라고 한다.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의 미곡을 수탈해 간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처럼 보였다. 수덕공원을 지나 일제 때 물자 반출을 쉽게 하기 위해 만든 해망굴을 답사했다. 군산의 내항과 시내를 연결하기 위해 만든 터널이라고 하지만, 수탈을 위한 왜놈들의 속셈을 보는 듯해 마음 한켠이 쓸쓸했다. 월명공원과 바다조각공원은 붙어 있었다. 발가벗은 어린아이의 익살스러운 모습을 비롯한 다채로운 조각품들이 한참이나 시선을 머물게 했다. 조각공원을 지나 필자는 탁류길이라는 이름을 탄생시킨 작가 채만식의 문학비를 찾아 월명공원 정상 쪽으로 갔다.
◇우리 민족의 아픔이 서린 탁류
아담하게 자리잡은 ‘채만식 문학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학비 곁에 한참이나 머물러 있었는데도 찾는 이는 없었다. 부조리로 얽힌 1930년대의 사회상을 풍자한 작품이자 군산을 무대로 일제강점기 시대의 억눌린 서민들의 삶을 생생하게 그린 빼어난 작품이 ‘탁류’다. 맑은 금강 물이 흘러와 군산에 이르러 탁류가 되는 이치, 우리 민족이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겪어야했던 아픔과 물질주의라는 흙탕물에 빠진 비인간적인 모습을 탁류라는 이름으로 고스란히 그려내고자 했을 것이다.
소설 속에 나오는 형보라는 인물과 공존이 아닌 공멸을 선택하면서까지 악(형보, 일제)을 물리치려고 했던 초봉이를 떠올리며 내려오는 필자의 바짓가랑이를 세찬 바닷바람이 할퀴고 갔다. 슬레이트 집들 벽에 군산 출신인 고은 시인의 ‘그꽃’과 굴렁쇠를 돌리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담아놓은 벽화가 그려져 있는 변두리를 지나 도심으로 들어왔다.
◇미워도 내 인생, 아파도 우리 역사
포목점을 운영했던 일본인 부상(富商) 히로쓰가 지은 집인 히로쓰가옥, 장군의 아들과 타짜 등의 촬영지로 더 알려진 곳이다. 히로쓰가옥은 나무로 된 전형적인 일본식 주택이다. 건물의 외형만 둘러보았는데도 주인의 위세와 부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기생을 얻으려면 평양, 권력을 얻으려면 한성(서울), 돈방석에 앉으려면 군산’이라는 말이 한때 회자될 정도로 군산은 부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일제시대 곡창지대인 호남의 미곡을 반출해 가기 위한 관문으로 군산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생긴 말이기 때문에 여기서 ‘부(富)’라고 하는 말은 기쁨의 의미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아픔과 수난의 의미로 들려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히로쓰가옥에서 장군의 아들과 타짜가 탄생되었다면 초원사진관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탄생시켰다. 주인공인 한석규와 심은하, 두 사람의 사랑 얘기를 사진관에 남아있는 사진이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듯했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만국 공통어가 ‘추억’인지도 모른다. 아픔들은 다 걸러내고 행복이란 이름만 남아있는 추억, 12월의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아련히 눈시울을 젖게 한다.
군산에서 유명한 해물짬봉으로 점심을 때운 뒤, 일제시대 미곡 수탈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한 구도심으로 갔다. 마치 일본의 소도시에 온 것처럼 일본식 집들이 즐비했다. 게스트하우스 고우당과 한국최초의 빵집인 이성당,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 등 모두가 이채로움이란 이름 뒤에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아픔과 그늘이 배어 있는 것 같아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동국사 한켠에 세워놓은 평화의 소녀상은 동쪽을 주시하면서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이 내 울적한 마음을 다소나마 달래주었다. 아픈 과거는 잊으려고 애쓸수록 더욱 마음을 저리게 한다. 미워도 내 인생이고 아파도 우리의 역사이듯, 이제 다시는 그 아프고 쓰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를 바로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함을 깨달았다. 군산을 뜨는 버스 차창에 오후 햇살을 가득 담은 넓고 큰 들판이 환하게 들어온다.
/박종현(시인·경남과기대 청담사상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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