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8 (316)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8 (316)
  • 경남일보
  • 승인 2016.11.29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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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8 (316)

‘내 이런 말 하모 또 니한테 무슨 소리 들을 끼다만 이거는 나도 나이 오십이 넘은께 깨달아지는 기더라만, 똑똑한 여자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참말 모리더라. 행복이란 공부를 많이 해야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평수 넓은 집도 아니고 두둑한 지갑이나 높은 벼슬, 또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도 아니더라. 여자는 생명의 종자를 잉태하고 출산하여 사람으로 키우는 참으로 거룩하고 성시러분 직분이 있다. 죽었다 깨어나면 모를까 남자들은 절대로 할 수 없는 그 장중한 일을 하는 몸이 자긴데 그거는 가볍게 생각하고 남자들과 엉뚱한 경쟁으로 자기를 나타낼라 카니 그게 탈이라’

굳이 너라고는 하지 않았지만 양지와 대면하고 있을 때마다 어머니가 잘하던 요지의 인생론이었다. 여자로서의 입장을 인지시키고 여성성을 길러주려는 어머니의 사고방식에다 비판의 화살을 날리며 우리는 어머니와 다른 별개의 몸통과 운명을 가진 별종이라고 나대며 살아왔던 겉똑똑이 딸들을 향한 일갈.

호남을 퇴출시키려는 살기어린 마을 노파들의 숨결에서 느꼈듯이 인류를 보존하고 지탱해 온 것은 사실 여자들의 생산성과 자정능력에 의한 것일 수도 있었다. 너무나 당연했기에 도외시해 온 부분, 고로 여자의 생산의지는 숙명적이다. 여자가 생산을 중단하는 것은 역사의 단절과 가문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머니도 오늘 그 자리에 있었다면 번쩍 손을 들었겠지.

골목에서 투덕거리는 여러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주영엄마야. 이해해라. 내 혼자 힘으로는 우찌 해볼라 캐도 안 되더라. 우선에 잠시만 다른데 있거라. 내 꼭 돌아오게 만들어 보꺼마.”

동구엄마의 진정으로 미안해하는 소리가 겹쳤다.

“괘안타, 여 아이모 설마 사람 살데 없나.”

여전히 기죽지 않은 목소리였으나 승복할 수 없는 불만이 호남의 어투에는 배어 있었다. 소리는 집 쪽으로 멀어졌다.

시선이 닿는 대로 눈을 돌리니 멍석처럼 담장을 뒤덮고 있는 담쟁이덩굴이 보였다. 하늘을 향해 머리를 쳐들고 한없이 너울거리는 모양이 구원을 부르짖는 애절한 손짓처럼 안타까워 보였다. 양지는 언뜻 고개를 든 어떤 기이한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언젠가, 꼭 이런 시간에 이런 기분으로 이런 자리에 있어 본 것 같았다. 꿈속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현장이 너무 낯익었다. 너절하게 흩어져 있는 가랑잎과 꾀벗은 감나무와 무궁화나무를 가장자리로 세운 텃밭이며 오똑하게 무덤을 이루고 있는 두엄더미며 엇비슷이 보이는 이웃집의 농기굿간. 저 담쟁이 넝쿨 때문인가. 저 희미한 초승달 때문인가. 양지는 고개를 저었다. 악몽이었다. 꿈이었다면 언제 이런 현실을 예시 받았던 것일까. 후미진 어둠 속에 숨어 서서 동생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역할 수 없이 예정되어 있는 수순의 절차를 따르고 있는 것 같은 이 기이한 현실감. 양지는 아니다, 아니다 하면서도 형제의 속으로 깊이 들어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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