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9 (321)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9 (321)
  • 경남일보
  • 승인 2017.01.17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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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9 (321)

귀담아 듣자니 께름칙하지만 최진사는 두 손을 내저으며 허세를 부렸다.

“이 사람 곡차나 들고 편히 쉬었다 가게. 원 말도 말 같아야 듣고 자시고 하지. 지난 해 우리 전답에서 난 소출이 얼마나 불었는지 아는가? 게다가 큰손자 돌 지냈고 며느리가 또 태중에 있어. 언감생심 어느 바람이 들이칠 울안이라고, 당치도 않는 그런 소리 할려거든 아예 상종을 하지 않겠어.”

최진사가 내미는 술잔을 내려놓고 분연한 음성으로 박처사는 일어섰다.

“그만하면 전에 입은 은혜 갚음은 한 셈이니 나는 가겠네. 부디 내 말이 허언이 되고 탈 없이 평안하시기를 빌겠네”

진의를 무시당한 분기로 가랑잎처럼 파르르 화를 내며 박처사가 중문을 나서자 최진사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원래대로의 자세로 돌아가 비스듬히 안석에다 몸을 기댔다.

‘재주가 너무 많아도 복이 없다더니’

박처사의 명민함을 연민하며 최진사는 스르르 눈을 감는다. 고대 박처사가 돌아와서 술잔이라도 받으면 노자 얼마라도 내리려니 생각다가 그도 성가셔서 고개를 저어버린다. 최진사의 뇌리에서 죽 떠먹은 자리처럼 박처사의 경고는 사라졌다. 중국비단의 노리끼리한 핫바지 속으로 최진사의 손이 미끄러져 들어갔다. 손동작에 따라 최진사의 눈시울이 아연 가늘어진다.

‘삼월이 그년. 그 샛별처럼 반짝이는 눈구녕을 진작 뽑아 놓아야 하는 건데’

갱엿같이 괴로운 신음이 최진사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만큼 반반한 년이 눈에 안 띄어서 그렇지 종년은 또 쌔고 쌨다. 대담한 년. 최진사는 눈을 떴다 다시 감았다. 삼월이 그 아이의 터질 듯 말 듯 매끄러운 맨살이 숨 가쁘게 그리운 순간이었다. 두 사람이 합일된 순간은 어떠했던가. 자신이 먼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림으로서 빈틈없이 충만함을 맛볼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단내 나는 입술을 귓가에 대고 애소하던 년의 비음은 분명히 면천을 애원하고 있었다. 그년은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이었다. 그년의 신분이 어째서 종년이란 말이냐. 하긴 그래서 일은 더 쉽게 시작되었고 또 빨리 끝나게 되고 말았던 게 아니던가. 년은 교태가 졸졸 흐르는 몸뚱이를 은어처럼 빼돌리며 황황스레 몸을 피했었지, 이미 정혼한 놈이 있다던가 어쨌다던가. 나이를 묻고 이름을 물을 필요도 없었다. 년을 비단금침 속으로 끌어들이는 일은 정낭에 앉아서 개 부르기보다 수월했다.

손을 홰홰 저으며 다시 일어난 최진사는 앞에 놓인 놋재떨이를 장죽으로 힘껏 내려쳤다. 괴로운 신음이 다시 잇사이로 삐져나왔다.

‘고얀 거, 제깟 것이 서방을 들여 가시버시로 살겠다며 달아났겠다?’

최진사는 년과 배가 맞아서 달아났다는 사내놈까지 찾아 물고를 낼 참이었다. 어디 그년 같은 년이 또 없을까보냐는 안방마님의 간곡한 만류가 아니었다면. 그러나 삼월이 같은 눈을 가졌고 휘늘어진 수양버들처럼 착착 감기는 허리를 가진 년은 눈에 뜨이지 않고 떨군 고기 같은 아쉬움 속에 눈만 감으면 년의 교태어린 몸매가 떠올라 최진사의 심기를 산란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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