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9 (322)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9 (322)
  • 경남일보
  • 승인 2017.01.17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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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9 (322)

최진사는 울화가 치밀었다. 그리움인가. 주착스러워서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었다. 그러나 되짚어보니 연결고리가 아리송했던 때가 있기는 했다.

어느 날인가 년이 보이지 않아 물어보니 년은 서방 따라 야반도주를 했다고 부인 하 씨가 일러주었다. 도지를 깎아달라고 아우성인 작인들을 다스리느라 영토를 둘러보고 다닐 무렵에 년이 단봇짐을 쌌다는 믿기지 않는 보고였다.

만상에 봄물이 흐드러지게 오를 때, 오늘 같은 날 더욱 년이 필요한 법인데…. 집안의 평화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아내 하 씨가 내린 감쪽같은 처단인 줄 짐작하고 있었으나 대장부 뺨치는 안방의 기지에 눌려 모르는 척 아쉬움을 감추었었다. 그러나 오늘 같은 봄날은……. 온갖 암상을 감추고 점잖은 척 거드름 피우고 있는 하 씨의 투기어린 처신을 썩은 박바가지처럼 박살내 버리고 싶은 분기가 치받는다.

최진사는 벌떡 일어서서 방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박처사는 알고 있음이었다. 그렇다, 년은 분명히 면천을 애소하고 있었다. 그리 서둘러서 야반도주 할 셈속은 아니었다. 긴가민가하던 안방 여자들의 투기와 음모가 비로소 확연해지는 순간이었다.

최진사는 주먹을 휘둘러서 방문을 열어 젖혔다. 안방으로 쳐들어가 뒤늦은 경이라도 쳐볼 셈이었다. 그때 얼굴이 파랗게 질린 젊은 하인 하나가 구르듯이 안채 쪽에서 뛰어 나왔다.

“나으리, 큰일 났습니다!”

파랗게 변한 아랫것의 상통을 굽어보던 최진사의 뇌리로 기왓골을 쯔릉 울리는 듯한 어떤 굉음이 흘렀다.

“큰 도령님이, 큰 도령님이 금방…….”

“큰 도령님이 와?!”

덮치는 예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벽력같은 소리로 최진사는 고함을 질렀다.

“유모하고 잘 놀았는데……. 방금까지 잘 놀았는데…….”

“야 이놈아, 속 시원히 털어 놔아! 아아가 우쨌단 말인지.”

최진사의 발꿈치가 치 닷분 마룻장을 꽝 울렸다. 대답이 튀어 날아왔다.

“녜, 지금 막, 지금 막.”

달려간 최진사의 눈앞에는 이미 눈을 감은 큰손자가 통곡하는 할미의 품에 안긴 채 늘어져 있었다.

“어허, 이런 변괴가 있나, 뭘 꾸물거리느냐. 어서 사관을 트고 의원을 불러야지!”

발을 구르는 최진사의 호령으로 어찌할지 몰라 옹송그리고 있던 하인들의 움직임과 아울러 잠자는 벌집을 쑤신 듯 온 집안이 수선스러워졌다.

마침 동구 밖 당산나무 아래 머물고 있던 박처사가 불려왔으나 절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네. 올 것이 온 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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