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 남해 다랭이마을
[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 남해 다랭이마을
  • 김귀현
  • 승인 2017.01.23 09: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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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천 다랭이마을과 다랭이논.

◇아름다운 신전 만들기

설흘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기슭에 ‘隨處作主(수처작주)’라는 글이 새겨진 장승이 서 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중국 당나라 임제선사가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공이 되라, 지금 있는 그곳이 바로 진리의 세계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늘 진실하고 주체적이며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현재 살아가는 이곳이 가장 행복한 세상이라는 삶의 진리를 담은 글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몸이라는 아름다운 신전을 짓는 건축가다’라고 말한 소로우의 말과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이라 생각한다. 인생은 자신만의 신전과 행복을 스스로가 짓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아름다운 신전과 행복을 짓는 일이 바로 힐링이면서 삶의 궁극적인 도달점인지도 모른다. 이번 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은 산악회 ‘더 조은 사람들’과 함께 응봉산, 설흘산, 가천 다랭이마을을 트레킹했다. 나 자신이 갈구하는 아름다운 신전과 행복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다.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을 아름다운 신전으로 만들어 가는 일, 그것이 바로 내가 사는 이곳에 진리의 세계가 머물도록 하는 일이며, 내 삶을 행복으로 가득 채우는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선구마을에서 출발한 산행, 숲길을 조금 올라가자 광산 개발을 목적으로 파다가 중단한 듯한 동굴이 있었다. 동굴을 지나자 말을 키우기 위해 돌담을 쌓아놓은 마성터가 나왔다. 지금까지는 비교적 산행하기가 쉬웠지만 칼바위 암릉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음을 졸이게 했다. 가까이 보면 천길 낭떠러지가 있고, 고개를 들어 멀리 보면 에메랄드빛 바다와 그 바다가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아름다운 어촌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응봉산 정상에 이르렀을 땐, 지나온 암릉길의 위태로움은 사라지고 아름다운 풍경과 희열만 배낭과 함께 따라왔다. 바로 이 순간이 진리의 세계이고, 아름다운 신전을 만들어 낸 순간이 아닐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밥무덤과 영험한 미륵바위

설흘산 정상에 닿자 새로 보수한 봉수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봉수대는 동쪽에 위치한 남해 금산 봉수를 받아 내륙의 망운산, 혹은 순천 돌산도 봉수와 연결되는 것으로 아주 중요한 통신시설이었다. 설흘산 정상에서 바라본 앵강만 바다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4시간에 걸친 산행을 마치고 가천 다랭이마을에 도착했다. 산골짜기의 비탈진 곳에 층층이 계단식으로 된 좁고 긴 다락논이 있는 마을이라고 다랭이마을이란 이름을 붙였다. 큰길에서 골목길로 접어들자 정겨운 시골 냄새가 아직도 남아있었다. 돌담에는 잎을 다 떨군 담쟁이덩굴이 앙상한 손으로 인사를 건네고, 어촌과 농촌 생활을 대변해 주는 벽화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농사와 더불어 숙박업을 하고 있었는데, 집집마다 붙여놓은 가게 이름이 눈길을 끌었다. 샘(우물) 옆에 있는 ‘새미끌집’, 비파나무가 있는 ‘비파나무집’, 가파르게 경사진 곳에 있는 ‘까꾸막’, 해가 뜨는 돋을양지에 있는 ‘해뜨는집’, 돌담을 길게 쌓아놓은 ‘긴돌담집’ 등 무척 정겹고 재미나는 이름들이다.

마을 아래뜸에 오자, 돌로 쌓아올린 밥무덤이 보였다. 밥무덤은 마을의 중앙·동·서쪽 언덕 3곳에 있다. 마을 중앙에 있는 것은 돌로 쌓은 굴뚝처럼 생겼으며 제사를 지낼 때 밥을 깨끗한 한지에 싸서 밥무덤 위켠에 있는 구멍에다 정성껏 흙으로 덮고 그 위에 납작한 덮개돌을 덮어둔다. 음력 시월 보름 마을 사람들이 모여 풍작과 풍어를 기원하고 마을의 안녕을 축원하는 동제를 지낸다고 한다. 아주 이색적인 민속자료인 밥무덤 바로 아래쪽에 그 유명한 암수바위가 있었다. 남성의 양기 모양을 닮은 숫바위와 임신한 여성의 배를 닮은 암바위, 모두가 자연석 그대로를 세워놓았다. 조선 영조 때, 남해 현령 조광진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땅에 묻혀 있는 자기를 일으켜주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자, 조광진이 아전을 데리고 가천 마을에 가보니 꿈에 본 것과 똑같은 지세가 있어 땅을 파자 숫바위와 암바위가 나왔다고 한다. 암바위는 누운 그대로 두고 숫바위는 일으켜 세웠는데, 바위 이름을 미륵이라 하고 해마다 미륵이 발견된 음력 시월 스무사흘 밤 자정에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사인 미륵제를 지냈다고 한다. 시월 보름에 지내는 밥무덤의 동제는 이 미륵제의 식전행사인 셈이다. 미륵바위를 손가락질하거나, 바위 가까이에 곡식을 심으면 화를 입는다고 생각했다. 상여도 반드시 바위 아래로 지나가야 탈이 생기지 않는다고 믿었다. 심지어 새가 바위에 앉으면 곧바로 죽을 정도로 영험이 있었다는 말도 있다. 미륵바위가 신령스러운 영험이 있다는 소문이 나자, 타 지역 사람들도 찾아와 촛불을 밝히고 병을 낫게 해달라고 비손을 하거나, 득남 등의 소원을 이루게 해달라고 기원하기도 했다고 한다. 암수바위는 단순한 성기 숭배의 대상물이 아닌 마을의 수호와 다산, 풍요, 소원 성취, 치병 등 민간신앙적 요소를 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맑고 푸른 바다를 키우는 다랭이마을

마을의 길들도 모두 계단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워낙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자 마을 사람들은 본업인 농사와 어업 대신에 손님들을 대상으로 숙식업을 주로 하고 있다. 마을 끝자락, 허브와 사포나리아 알로에 홍보농장의 허브길을 지나자 남해바래길의 하나인 다랭이지겟길이 바닷가로 이어져 있었다. 군데군데 경치 좋은 곳에다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팔각정을 만들어 놓았다. 팔각정에 잠깐 앉아 쉬면서 아픈 다리품도 달래고, 맑고 잔잔한 겨울바다를 보면서 번거로운 일상을 한순간이라도 잊어버릴 수 있어서 참 좋다.

생태주의 철학자인 소로우가 한 말처럼 필자도 오늘 하루 나 자신을 위한 아름다운 신전 하나를 지어, 그 신전 속에서 행복한 하루, 힐링하는 하루를 만끽하고 싶다. 자리 하나 때문에 남을 짓밟는 조직사회나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남의 몫까지 챙기려고 하는 세상에서 벗어나, 지금 머무르고 있는 이곳에서 진정한 주인공이 되어 삶을 영위해 나간다면 세상은 모두 참된 진리로 채워질 것이고, 다랭이마을 앞바다의 맑고 푸른 바다처럼 마음은 온통 행복으로 가득 차오를 것이라 믿는다.

/박종현(시인·경남과기대 청담사상연구소 연구원)




다랭이마을에 있는 암수 바위.
시월 보름에 제사지내던 밥무덤.
설흘산 정상에 있는 봉수대.
다랭이마을 골목길 모습.
설흘산 입구에 있는 장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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