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9 (323)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9 (323)
  • 경남일보
  • 승인 2017.01.17 22: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9 (323)

“올 것이 온 거라니……. 그럼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었단 말인가?”
최진사는 털썩 무릎을 꿇며 허탈하게 입을 벌렸다. 파랗게 변한 손자의 시신이 눈앞에 부웅 떠올랐다. 벙그는 함박꽃처럼 활짝 웃을 때 드러나 보이던 온갖 즐거움과 앙증스럽던 하얀 젖니들···. 앞날을 기대해도 좋을 무성한 거목감이었는데. 아아, 어이 할 거나.
지축이 무너지는 듯 한 아뜩함이 최진사의 감각을 함몰시켰다.
종으로 횡으로 잇대어 있는 안채, 사랑채, 뒤채, 별당, 행랑채, 곳간 마구간 등의 기왓골이 꿈틀꿈틀 비늘을 세우고 일어나서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맏손자는 종가의 대를 잇는 외의 희망을 온 집안에 떨치고 있었다. 겨우 두 돌바기가 천자문을 곧잘 외우는가 하면 장골이 두 명 양쪽에서 들어야하는 지게문을 한 손으로 밀어젖혀 지난여름에는 온 집안을 놀라움 반 우려 반으로 발칵 뒤집었다. 문무 겸비한 출중 재인의 탄생 아니겠는가. 그렇잖아도 가문의 한미가 느껴져서 어서 자손이 흥성하거라 애태우고 있던 참이었다. 손가락이 끼어서 자지러질 듯 우는 걸 발견하고서야 아기가 문을 밀었음을 알았다며 아기가 어떻게 그 무거운 것을, 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께는 아기의 손가락에 깊이 팬 상처를 보여주며 자랑을 하곤 했다. 
최진사의 마음 한 구석에 도사리고 있던 미망이 검은 그림자를 펼치는 순간이었다. 앞서 여러 번 박처사의 암시도 있었다. 해 묵은 기왓골에 뿌리 내리고 피어나는 극성맞은 잡초들··· 집이 너무 늙었다. 곡식도 해 걸러서 윤작이 필요한데 묵은 터에 새 인걸? 박처사의 암시도 무시한 채 자주 엇갈리는 비유를 자문자답하며 털어냈던 것이다.
“어서 기운 차리고 좌정하시게. 처방이 영 없는 것도 아니니 이제라도 내 말 명심해서 거행해야 되네.”
그러나 죽은 아이를 살릴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누군가 알을 품고 있는 닭모가지에다 침을 꽂았음이야. 온갖 살(煞)이 비쳤어.”
박처사가 천기누설이라며 굳이 거부하던 말문을 연 것은 해거름이 거의 다되었을 무렵이었다. 말 안해도 될 충분한 징후가 나타났으니 다음 일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터, 알아서 피신이나 하라는 박처사를 최진사는 잡고 늘어졌다. 
“누가, 누가 감히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누구를 찾아내서 벌 줄 생각부터 하는 그 오만함부터 고쳐야 하네.”
듣고 보니 박처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대대로 이어져 온 터전이 가로질러 십리를 넘는다. 그 땅에 명을 걸고 빌붙어 사는 씨종이며 소작인들이 얼마인데……. 그들이 모두 충복일리 없다는 점은 알면서도 혹 그런 반증이 보였어도 작인들 끼리 처리하라 가볍게 얼러 넘겼다.
아랫것들의 면면들을 떠올려 보는 충혈 된 최진사의 눈빛을 건너보던 박처사가 못마땅함을 참지 못하고 대뜸 입을 열었다.
“아니 멀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