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9 (324)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9 (324)
  • 경남일보
  • 승인 2017.01.17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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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9 (324)

빠르게 돌아 온 최진사의 눈빛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자네 삼월이, 잊지 않았지?”

“삼월이?”

최진사의 음성이 부러지듯 튀어 올랐다.

“삼월이로 보면 지체만 다르다 뿐 안방마님이나 저나 동격으로 자네를 다툴 수도 있었겠지.”

“그렇잖아도 궁금했어, 그 년 지금 어디 있나?”

“나도 잘은 모르네. 핏덩이 하나를 떨군 뒤 산후풍으로 죽었다는 뜬소문 뿐…….”

혼잣소리로 중얼거린 박처사의 말이 마치 바늘 끝처럼 최진사의 가슴 한 구석을 찔렀다. 박처사의 말처럼 아무리 천한 계집이었지만 그년한테도 인격이란 것은 있었을 것이거늘.

박처사의 지적은 늘 이렇게 심기를 긁는다. 최진사는 호통에 가까운 음성을 내질렀다.

“그래, 그 년이 한을 품고 죽어서 내가 벌을 받는다는 게야 뭐야!”

여자, 그게 작아도 요물의 씨종자인 걸 알았어야지. 그러나 박처사는 애써 입을 열지 않는다. 공은 쌓은 대로 가고 죄는 지은 대로 가는 법. 짐작조차 없지는 않다. 웅장한 최진사네의 기왓골에는 벌써 요기가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박처사의 귀에는 그들의 원성이 들렸다.

‘이놈 최가야,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사내놈들의 그 이중적인 처신, 양반이라는 허울로 가린 양심이 멸망을 부르는 거야. 서서히 피가 말라 목숨이 지듯 네 집 운기가 다할 것을 원혼들은 안다. 여인함원(女人含怨)이면 오월비상(五月飛霜)이랬다.’

“사람끼리 복도 주고 재앙도 주는 법인데, 늦었으나마, 높낮이 없이 인격을 존중하고 수신제가를 하게.”

고통스런 신음을 주먹으로 토해내는 최진사의 귀에 과연 얼마나 깊이 그 충고가 새겨질까. 친구라는 이름으로 당하고 넘긴 수모가 박처사에게도 적지 않았지만, 친구의 집이 멸문에 이르는 것을 즐길 만큼 좁지 않은 그의 아량은 나름의 조언을 한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기울어있었다.



“꼭 집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나의 생모나 외숙모님 모두 그 흥망성쇠의 흐름에 쓸린 희생양인지도 모르지. 아무리 한껏 과학문명이 발달한 시대라 해도 사람이 느끼는 운기라는 불가사의함마저 거스르기는 어렵거든.”

말을 마친 오빠는 손에 든 은단 한 알을 양지에게 건네주며 마치 묵은 것을 털어내듯 한 깊은 심호흡을 뱉어냈다.

“저도 이제부터는 엄마 말대로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살겁니더. 엄마는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안고 가니 앞으로 우리는 모두 잘 될 거라 했거든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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