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9 (329)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9 (329)
  • 경남일보
  • 승인 2017.01.17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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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9 (329)

누구에겐가 들은 소리가 생각났다. 취중에 진정한 말을 한다. 지금 아버지는 취했다. 혼자 성내고 조소하며 응어리 진 잠재의식의 한을 쏟아 내고 있다.

갑자기 말이 끊겼다 싶어 돌아보니 아버지는 자신의 품안을 뒤적거리며 무언가를 꺼내는 일에 골똘해 있었다. 마음의 명령을 손이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자 주머니를 뜯어버릴 듯이 아무렇게나 잡아당긴다. 강파른 성깔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이윽고 무엇인가 네모 난 종이를 꺼내서 들여다보는 순간, 아버지의 얼굴에는 잠깐 형언할 수 없는 어떤 색조가 봄 햇살같이 머물렀다. 그리곤 마치 휴지라도 버리듯이 가볍게 양지가 서 있는 곳으로 그 종이를 던져 버렸다. 양지로 하여금 주워 보기를 원하는 동작이다. 시선만 보내도 읽을 수 있는 곳으로 종이는 날아와서 착지를 했다. 사진. 양지는 호기심 어린 눈길로 사진을 향해 초점을 모았다.

아버지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아직 어린애랄 수도 없는 아주 작은 영아의 모습이 환영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확대되는, 일부러 기저귀를 채우지 않고 노출시켜 놓은 듯 두 다리 사이로 쫑긋하게 드러나 있는 앙증스러운 작은 고추.

“엄마한테는 와 바른 대로 말 안했십니꺼? 그리고 와 우리들한테도,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일을 우리만 모르게 숨킷십니꺼?”

“숨키다이, 뭐로?”

자신에게로 당겨지는 시위가 있다는 것 자체를 못 견딘 아버지의 반문이 퉁겨질 듯이 팽팽하게 날아왔다. 오빠와의 대화로 이미 정리된 일인데 다시 거론하기 열없었지만 아직 그 건에 대해서는 터놓고 아버지와 논쟁조차 해 본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잇사이로 바람이 새는 듯 한 묘한 웃음을 날렸다. 그리곤 하늘을 쳐다보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양지의 말뜻을 알아챈 듯 자신만의 말을 뇌까렸다.

“산삐들키 먹콩 줘먹드키 따꼼따꼼 나이만 쳐묵다가 가리늦게사 철들었제, 흐흐흐… 내가 뭐이고, 사람인기라, 묵은 만큼 싸고, 또 쌀 꺼리를 찾아헤대는.”



(그게 아버지의 알량한 인생철학입니꺼? 너무 억울해요. 뭐라고 제가 납득할 만한 뭔가를 말 해주이소. 당장 이 자리에서 지어내도 상관 없다꼬예.)



아버지가 갑자기 땅을 주먹으로 치기 시작했다.

“이라모 되겄나? 살아서 서푼어치도 안 되던 기 죽어서 만냥 어치란 말이 만고에 명언이다. 내가 지금 기댈 언덕이 없다. 야, 이년아! 이 모질고 똑똑한 년아. 니는 우짠다꼬 에미가 그리 죽을 걸 눈치도 못 챘단 말이고. 가자, 못 간다, 발버둥 쳐도 인생은 잠깐이다. 아서라, 이 세상 한 나절 낮꿈인 것을…. 술이 없다. 한 병 사온나.”

“많이 취하셨어요.”

“것도 몬 들어준다 이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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