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0 (340)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0 (340)
  • 경남일보
  • 승인 2017.01.17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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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0 (340)

서장대로 가는 길을 걸을 때는 이 강 기슭의 너럭바위에 길게 늘어앉아서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방망이소리가 마치 음악소리 같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자 추여사는 연상되는 광경을 그려보듯 성벽 아래를 살펴보기도 했다.

“처음 차에서 내렸을 때는 너무 조용해서 답답한 시골 같았는데 아늑하고 참 좋다. 마치 고향에 온 것모냥으로 확 끌리는 게 오기는 참 잘 왔다 싶어.”

집으로 돌아오자 하루 종일 구경 다니느라 피로할 법도 하건만 추여사는 몇 번이나 했던 감탄사를 매우 흔쾌한 목소리로 다시 늘어놓았다. 군불솥에 데운 물로 발을 씻던 추여사가 생각난 듯이 고개를 돌리며 방안에 있는 양지를 보고 물었다.

“참 아까 논개 사당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지? 산홍인가 뭔가 하는 기생 이야기.”

걸레로 방을 훔치던 양지가 못 알아듣고 대답을 않자 추여사가 다시 큰 목소리를 냈다.

“돈 앞에도 흔들리지 않는 애국심으로 논개 못지않은 의기가 또 있었다 했던가? 아아 인제야 바로 생각난다. 을사오적의 한 사람인 친일파 이 지용이 기생 산홍이를 본 순간 홀딱 정신을 빼앗긴 나머지 많은 돈을 내놓으면서 자신의 첩이 돼달라고 요구했는데 딱 거절했댔다 그렇지? 그 이유가 참 멋졌는데 뒷말을 깜빡했다. 뭐랬더라?”

“세상에서 이 대감을 오적의 우두머리라고 합니다. 첩은 비록 천한 창기이오나 자유로이 사람구실하고 사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 하고 거절하니 크게 화를 낸 이 지용이 산홍에게 몽둥이질을 했다고도 하고 또 끈질긴 이 지용의 협박과 성화를 견디지 못한 산홍은 자결했다고도 해요.”

“아이고, 참 맵고 독한 성정 아니면 안 되는 결심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으리으리한 사내를, 그것도 항차 기생이, 맘 하나 접으면 평생 호강하고 살 수 있는 길을 마다하고 걷어찼다니-”

“그러니까 죽어서도 오래 살고, 맑은 정신의 씨앗이 되잖아요.”

이런 저런 관광 후일담을 주고받는 동안 두 사람은 잠자리에 들 준비를 얼추 마쳤다. 따뜻하게 덥혀진 이불을 들추고 드러누운 추여사가 천정을 올려다보며 어린애처럼 들뜬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내일은 우리 최실장이랑 나랑 같이 살 집을 보러간다아. 한옥이 나을까 슬라브집이 나을까? 어떤 쪽이 좋을까? 나는 무조건 양지가 선택하는 대로 따라할게.”

손에다 크림을 바르던 양지의 안색이 아연 굳어진 것은 순간이다.

“추여사님, 우리 둘이 여기서 같이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솔직히 말씀 드리면 사실 저는 추여사님을 모실만한 경제적인 능력이 없어요.”

양지의 말에 언뜻 고개를 돌린 추 여사가 발딱 활기를 떨치며 일어났다. 어린애 같은 단순함이 엿보이는 밝은 얼굴을 보인 그녀는 얼른 방구석으로 기어가 자신의 여행 가방을 끌어다놓고 주섬주섬 내용물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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