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0 (343)
“쾌남아, 쾌남아! 어서 좀 나와 봐라! 크크큰, 일 났다아!”
얼마나 숨차게 달려왔는지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문턱을 짚고 한참이나 가쁜 숨을 가누고 있는 여자는 동네 어귀에 혼자 살고 있는 정자어머니였다.
무슨 일이 내 주위에서 또 일어났구나. 양지의 가슴은 이미 소리도 없이 내려앉았다. 아버지? 호남이? 그녀의 머리는 빠르게 사고의 범위를 훑고 돌았다.
얼굴이 해쓱해지도록 놀라움에 뜬 정자어멈은 여전히 말을 더듬으며 똑 떨어지게 연결 안 되는 의사전달에 안간힘을 쓴다. 얼른 나오지 않는 말보다 더 확실하게 어디론가 같이 갈 것을 강요하며 내젓는 손길이 찢어진 패자의 깃발처럼 양지의 불안함을 휘젓는다.
“그, 그그 여자, 어엊그제 니니 찾, 찾아 왔던 여자, 여자가-”
양지는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촉수를 높인 예리한 눈길로 정자어멈의 얼굴을 주시했다. 어제 찾아왔던 여자는 추여사 밖에 없다. 예상 밖의 무슨 일이 또 벌어진 것이다. 아직도 추 여사가 여기 머물러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으므로 놀라움은 더욱 증폭되었다.
“아이구, 나 몰라. 엊그제 너 찾아온 서울 여자 말이다. 그 사람이 글씨, 우리 집에서 근사미를 묵었다. 늦어서 못가겠다꼬 하룻밤 재워달래서 거절 몬했더마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짐작이나 했것나.”
“근사미요?”
“그래, 근사미 말이다, 근사미. 아카시나무 쥑이는 농약.”
양지는 자신도 몰래 구멍 나 있는 허망한 자긍심에 발이 어디를 딛는지도 모르고 골목길을 뛰었다.
정자어멈과 이웃하여 같이 살던 안면 모르겠는 다른 노파 하나가 벌벌 떨리는 시늉으로 석류나무 밑에 서 있다가 양지와 정자어멈을 보자 마주 뛰어나왔다.
“우찌 됐노?”
정자어멈이 묻자 이 늙은이 역시 밀가루를 하얗게 뒤집어 쓴 듯 한 흰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진저리를 쳐 보인다.
“안즉 죽지는 안했는디, 내사 마 무서바서 몬보것해서 나왔다. 인간 세상에 이런 일이 어데 있노. 목전에서 몬보것다. 이리 될 줄 알았음사 매몰시리 내치지만 말고 좀 받자를 해 줄꺼 아이가.”
양지를 흘낏 돌아보며 덧붙이는 말뜻이 먼 길 찾아온 사람을 애써 쫓아낸 인정머리를 나무라는 것 같다. 정자어멈이 열어 보이는 방문 앞까지 갔다가 독극물을 마시고 몸부림치는 추 여사의 모습을 바라 볼 자신이 없어 양지는 이내 멈추어 섰다.
순서가 어긋난 듯 했지만 자신을 괴롭힐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사태 안으로 얼른 자신을 디밀고 싶지 않았다. 모면할 수 있다면 어디든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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