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 김해, 가야사 누리길
[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 김해, 가야사 누리길
  • 김귀현
  • 승인 2017.02.21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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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지봉 정상에 있는 구지봉석


◇역사의 뒤안길이 된 가야사(伽倻史)

흔히 역사는 우리의 미래의 모습이라고들 한다. 우리가 역사를 소중히 여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 역사에 대한 되새김질을 통해 보다 밝은 미래의 역사를 기약하기 위해 우리는 시간여행을 떠난다. 그래서 우리가 걷는 역사의 길은 늘 아픔과 반성, 그리고 다짐이 따르기 마련이다. 우리 역사는 일반적으로 고조선, 삼국시대, 고려, 조선, 대한민국으로 이어진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경상남도의 옛 땅인 가야는 역사의 중심에서 빠져있다. 나중에 신라에 합병되어서 그런 점도 있겠지만, 가야의 흔적이 삼국의 문화유적 못지않게 많이 남아있는 것이 현실이다. 역사의 본류에서 한 걸음 물러나 뒤안길에 묻힌 채, 홀대받아 온 가야사를 찾아 시간여행을 떠났다. 아울러 필자와 우리 후손, 이 땅의 밝은 미래를 꿈꾸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가야사 누리길, 시간여행은 수로왕릉에서 시작해서-5일장-전통시장-향교-수로왕비릉-구지봉-김해국립박물관-수릉원-수로왕릉으로 되돌아오는 코스를 잡았다.

먼저 수로왕릉부터 찾았다. 출입문인 숭화문을 들어서자 홍살문이 먼저 우리를 반겼다. 탐방객들에게 경의를 표하게 함과 더불어 신성한 구역임을 나타내는 홍살문 앞에서부터 돌을 깔아놓은 세 가닥의 길이 있었는데, 중앙은 신도(神道)이고, 그 양쪽은 탐방객들이 걸어가는 길이다. 가락국 수로왕릉, 신라시대의 왕릉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아주 단아한 모습이었다. ‘광 속이 무척 넓고 두골의 크기가 구리로 만든 동이만 했다. 손발이나 사지의 뼈도 매우 컸다. 널 옆에 두 여자가 있는데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았고 나이는 20세쯤 되었다. 이것을 광 밖에 내다놓았더니 금시에 사라져 없어졌다고 한다. 아마 순장된 사람들일 것이다.’ 임진왜란 때 도굴당한 수로왕릉에 대해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이는 수로왕의 탄생신화에서 키가 아홉 자가 넘는 거인이라고 한 내용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릉이 왜놈들에 의해 도굴당했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무거웠다.

 
▲ 구지봉 정상에 있는 거북 머리모양의 입석


◇소박한 모습의 수로왕비릉

수로왕릉 뒤쪽, 용비늘 돋은 소나무들이 늘어선 능림을 한 바퀴 돌아서 연지(蓮池)에 닿았다. 구지봉에 있던 천강육란석조상(天降六卵石造像)을 연못 옆에 옮겨 놓았다. ‘삼국유사’의 가야 건국설화에 따르면, 가야 땅을 다스리던 아홉 추장이 구지봉에 모여 제사를 지내는데, 문득 하늘에서 알 여섯 개가 담긴 금합이 붉은 실에 매달려 내려왔다. 이튿날 그 알 여섯 개가 차례로 깨어지며 아이가 하나씩 나왔는데, 그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부쩍부쩍 자라나서 열흘째가 되자 모두 키가 아홉 자가 넘는 어른이 되었으며, 그 가운데 맨 먼저 나온 이가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이 되었다고 전한다. 김수로왕의 난생(卵生) 설화가 담긴 육란(六卵), 어떤 사람은 비과학적이라고 무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필자는 인간도 모두 알에서 탄생했다고 생각한다. 알의 다른 모습이 자궁이다. 고등동물일수록 잘 깨지지 않고 종족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는 완벽한 모습의 알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화와 전설을 비유나 상징적인 표현을 통해 본질을 미화시킬 줄 아는 우리민족의 지혜와 상상력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수로왕릉 앞에는 2, 7일마다 서는 김해 오일장이 열리고 있었다.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으며 농, 수, 공산물 등 다양한 물품들이 소비자들을 불러 모은 것 같았다. 그런데 오일장에서 조금 떨어진 김해전통시장에는 상가 주인들만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전통시장의 현실을 보는 듯해 안타까웠다. 구지봉과 수로왕비릉으로 가는 길은 물어물어 갔다. ‘가야사 누리길’ 안내판이 보이질 않아 다소 아쉬웠지만, 김해 시민들의 친절함 덕분에 쉽게 수로왕비릉을 찾을 수 있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파사석탑이다. 원래는 호계사에 있었는데, 조선시대 김해부사였던 정현석이 ‘이 탑은 허황후께서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것이니 허황후릉에 두어야 한다’며 현재의 자리에 옮겨놓았다고 한다. 인도의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이 수로왕과 국제결혼을 하면서 가지고 온 혼수품인 파사석탑은 측면과 하면 등에서 다양하고 기이한 조각의 흔적이 있으나 파손과 마멸이 심해 그 내용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오후 햇빛에 비친 5층 석탑은 보는 각도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그 색깔이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파사석탑 바로 뒤에 수로왕릉비가 있었다. 황후의 릉인데도 다른 장식물이 없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무덤이 요란하다는 것은 백성들을 괴롭혔다는 의미일 지도 모른다. 소박한 모습의 허황후릉을 지나 바로 옆에 있는 구지봉으로 갔다. 수로왕의 탄생설화와 함께 구지가(龜旨歌)가 탄생한 곳, 어딘지 모르게 신비로움이 깃들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을 갖고 찾은 구지봉, 신비함이나 신령스러움보다는 마을 동산 같은 친근감이 들었다. 그렇다. 신화는 바로 우리 곁에서 탄생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봉우리의 모양이 마치 거북이가 엎드린 형상과 같다고 해서 붙인 구지봉, 꼭대기엔 거북의 머리를 닮은 바위가 우뚝 서 있고 남쪽에 지석묘인 구지봉석이 있는데 한석봉이 쓴 ‘구지봉석’이란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 단아한 모습의 수로왕릉


◇새로운 세상을 연 수로왕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만약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 옛날 가락국 사람들이 구지봉에 모여 왕을 맞이하기 위해 흙을 파며 불렀던 노래인 ‘구지가’다. 이는 어쩌면 당시 사람들이 학정에 시달리거나 망나니 같은 존재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자신들을 구원해 줄 새로운 지도자를 간구하며 불렀던 노래였을지도 모른다. 이 노래가 결국 가락국 사람들이 원하는 지도자를 만나게 해 주었다. 영험이란 크고 높은 곳에서만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친숙한 곳이나 대중의 바람이 모이면 바로 영험함이 이루어짐을 알 수 있었다. 일제시대 왜인들이 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구지봉과 거북의 머리부분인 수로왕비릉 사이의 혈을 잘라놓았다고 하는 것만 보아도 이곳이 영험한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이 명당자리이고, 이곳을 사랑하는 것이 곧 행복과 힐링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깨달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박종현(시인·경남과기대 청담사상연구소 연구원)



수로왕비릉 옆에 있는 파사석탑
연지공원에 옮겨놓은 천강육란석조상
텅 빈 김해 전통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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