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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413)<173>탄생 100년을 맞는 시조시인 최재호(1)
김귀현  |  k2@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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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3.03  04: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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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아천 최재호(我川 崔載浩, 1917-1988) 시조작가의 탄생 100년을 맞는 해이다. 최재호 시조작가는 경남 고성군 하일면 학림리 학동에서 1917년 5월 6일 태어났다. 1917년은 윤동주가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난 해이고, 파성 설창수는 한 해 앞서서 창원에서 태어났다. 최재호와 막역한 사이였던 통영 출생 김상옥은 최재호보다 3년 뒤인 1920년에 태어났다.

최재호는 본격 활동을 진주에 나와서 한 것이 중심이고 또 거의 전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세상에 살았던 세월은 71년간이니까 오늘날로 치면 그렇게 장수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점하고 있었던 1950년대로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40여 년의 활동은 진주의 문화예술, 교육, 언론, 사회 각방면에 걸쳐 눈부신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전천후 지도자요 능력 있는 전문가였다.

우선 문인으로서의 활동을 살펴볼 수 있다. 한국문인협회가 새로 탄생하는 그 무렵 한국문인협회 진주지부장(1962~1969)을 맡아 문학예술의 토양을 가꾸는데 힘을 썼고, 이와 병행하여 한국예총 진주지부장(1962~1969)으로서 개천예술제를 반석 위에 올려세우는 데 진력을 다했다. 이 시기에 진주문인협회나 진주예총의 살림살이는 어느정도 본 궤도에서 돌아가는 셈이 되었다. 최재호 작가의 개인적인 경제 능력이 비교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테면 예술제 기간중에 타지에서 참여하는 시인 예술인들은 후렴잔치가 각별해서 진주를 생각하면 엔돌핀이 나온다는 사람이 많았다는 풍문이 돌았다. 예술인들은 본게임보다 후렴잔치인 비공개 게임이 중요했다.

그러다가 아천 최재호 이후 체제에서는 정해진 예산으로 행사집행에도 부족한 예산인데 어디 따로 잡는 스케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늘 참여해오는 예술인들에게는 총무나 사무국장에 기댈 형편도 못되는 상황에서 점차 후렴잔치의 기대치는 소멸되어 갔다.

아천 최재호는 시조집 ‘비취단장’(1962), 번역시집 ‘하정시집’(1979), 시집 ‘아천시집’(1986), 유작집 ‘아천문집’(1993), 유작집 ‘아천 번역문집’(1997) 등을 남겼다. 그중 인구에 회자되는 작품은 ‘석굴암’이다. 이 ‘석굴암’에 연결되는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다. 이 곡은 1976년 이수인 작곡가가 37세 되던 해에 마산에서 제일여고 교사생활을 할 때 서점에서 최재호의 시집을 읽고 ‘석굴암’에 진한 감동을 느꼈다. 그 뒤 서울에서 지내던 어느날 문득 고교시절 석굴암 여행을 떠올리면서 그 시조작품을 결부시켜 작곡하게 된 것이다.

“토함산 잦은 고개,/돌아보면 쪽빛 동해!//낙락한 장송 등걸/ 다래넝쿨 휘감기고// 다람쥐 자로 앞질러 /발을 멎게 하여라// 한 고비,또 한 고비/ 올라서면 넓은 안계// 쓰러진 신라천년 / 꿈도 서려 감도는가..../막달아 아늑한 여기/ 굴이 하나 열렸네// 칡뿌리 엉긴 흙을/ 둘러막은 십육 라한// 차가운 이끼 속에 /푸른 숨결 들려오고// 연좌에 앉으신 님은/ 웃음마저 조으셔라”(‘석굴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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