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0 (351)
“추 여사님, 여기가 눈 익지 않으세요? 아줌마의 고향에 왔어요.”
한참만에야 축이 무너져있는 곳을 발견하여 물가로 내려서는데 울컥 눈물이 솟구쳤다. 그러나 양지는 얼른 눈물을 삼키고 아무렇잖은 듯 태연하게 자세를 바로 잡았다. 삽을 메고 논둑길을 걸어가던 남자가 아까부터 이상한 듯 뒤돌아보고는 했다.
“아줌마 여기가 낯익지 않아요? 여기 바위 밑 깊은 물에서 여름에 한 번쯤 멱을 감지는 않았어요? 하기야 눈칫밥 먹느라고 언제 그런 평화스러운 유년시절을 보낼 수나 있었겠어요.”
“그래, 고향 있지. 도시든 시골이든 고향 없는 사람이 어딨어. 시골치고는 멋지고 출신도 괜찮았어.”
추 여사의 증발 후 말로만 들었던 추 여사의 고향을 홧김에 찾아갔었다고 강 사장은 그랬다. ‘가까운 친척도 없어. 엄마가 일제 때 공부를 많이 했는데, 신식 연애 때문에 옳은 가정도 못 가지고 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버림받은 눈치꾸러기였어. 전쟁 무렵에 중국으로 넘어 간 어미가 소식도 없으니 자식은 자연히 천애고아 신세가 안 되고 어쩌겠어. 그리저리 눈치로 커서 이게 결혼을 했는데 시집에서는 외로운 며느리를 감싸 주기는커녕 따돌리고 그랬나봐. 어쩌다가 딸 하나를 낳았는데 그것 키우는 재미로 살려는데 또 남편이 노름방에서 트잡이를 하다가 징역살이를 하고, 그렇게 되니까 재수 없는 며느리 때문에 집구석 망쪼가 들었다고 노골적인 구박이 심해졌나봐. 하는 수 없이 딸애를 업고 도망을 쳤는데 나랑 만났지. 본인 입으로는 그래도 부모가 일류 멋쟁이고 유식했다는 소리는 더러 했지만. 왕년에 금송아지 한 마리 안 키워 본 사람 있나 하고 웃고 말았는데 끝내 어린 딸도 죽고 저까지 이 지경으로 떠나게 됐네.’
“아줌마의 외로움 고독 같은 걸 이제야 조금 이해할 것 같아요. 용서해 주세요. 저 같이 매정하고 냉정한 애를 아줌마가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 처음에는 성가시고 부담스럽기조차 했어요. 그러나 오늘은 아줌마의 딸이 된 심정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아줌마, 후생에는 제발 평범한 부모 만나서 행복하게 성장하여 외톨이로 살지 말고 사랑도 길이길이 누리도록 잘 태어나세요.”
눈물이 뜨겁게 볼을 타고 내렸지만 양지는 닦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새가 물가의 돌에 앉아 꼬리를 까닥거리다가 재빠르게 날아가는 게 보였다. 거품이 조금 떠있는 물의 표면을 내려다보던 양지는 주위를 한 번 다시 둘러보았다. 언제 물 섶에 서있는 나무나 풀들이 물의 흐름에 따라 쓰개인 힘든 모습을 이리 주의 깊게 바라 본적이 있었던가.
된통 겪었던 물난리의 흔적이 여기저기 드러나 있다. 몸통이 뒤틀린 갯버들, 가지가 찢어진 채 무너지는 흙속에다 가는 뿌리를 간신히 걸고 힘겨운 몸체를 지탱하고 있는 미루나무 들.
저작권자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