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0 (352)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0 (352)
  • 경남일보
  • 승인 2017.01.17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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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0 (352)

그뿐 아니다. 달맞이꽃이나 망초, 억새며 띠풀들은 어떤가. 흙탕물 홍수가 밀려오면 도리 없이 뒤집어쓰고 물결의 흔들림에 몸살을 겪다가 죽음도 삶도 분간 없는 멍한 표정으로 제 자리에 발 묶여 있다 계절이 바뀌면 후대에게 밀려 흔적도 없이 생의 종말을 맞는다. 그들 여린 생명들에게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절박한 일들이지만 하도 비슷비슷한 내용들이라 아무도 그것들의 고통에 관심을 갖지도 않는다. 사람이 사는 모습도 그와 비슷하다.

간간이 지나가는 차 소리만이 적요하기 이를 데 없는 시골의 공기를 가를 뿐 인적도 없다. 옆에 놓았던 보퉁이를 끌어당기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 시간을 달려 온 길이었다. 화장장에서 차례를 기다리느라 오전 시간을 거의 보내고 온 김이라 해는 어느덧 건너편 산 쪽으로 설핏 기울고 있다.

양지는 깊은 물에 반쯤 잠겨있는 바위 위로 건너가서 보자기에 싸인 사과박스를 조심스럽게 풀었다. 꼭 그렇다면 이렇게라도 하고 가라. 언니에게 주검 상자를 안겨 보내기 싫다며 실랑이를 하던 호남이 어디서 구해왔는지 추 여사의 유골함을 넣어서 싸준 것이었다.

“미안해요 아줌마. 정말 전 철이 너무 없었어요. 아니요, 나는 세상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어요. 그리고 내 욕심대로 무엇이든 쟁여놓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상실의 상처를 깊이 남긴 채 나를 떠나갔어요. 그래서 나는 아줌마의 사랑도 받아들이기를 꺼렸던 거예요. 다른 사람은커녕 나 자신도 따뜻한 마음으로 어루만지기 겁이 났어요. 눈길을 주면 마음을 주어야하고 마음을 주는 순간부터 나의 존재감마저 잃어버리고 나약해질 것이 너무 두려웠어요. 나중 내게 정말 필요한 그때엔 누가 나를 도와 줄 것인가. 사람은 사람대로, 물건은 물건대로, 나 아닌 대상에다 나를 빼앗긴다는 것이 너무 두려웠어요. 아주머니와 같은 외로움, 그 막막한 고절 감을 왜 이해 못하겠어요. 하지만 아주머니는 저랑 다른 줄 알았어요. 미안해요. 전 이렇게 모자라는 부분이 너무 많아요. 부디 좋은 곳으로 가세요. 저는 아무 종교도 가진 게 없지만 아줌마 더러는 좋은 곳에 다시 태어나시라고 빌고 빌겠어요.”

신중한 손길로 차근차근 사과 박스의 접힌 부분을 펼치던 양지는 아, 낭패스러운 기색으로 얼굴이 굳어 버렸다. 상자 속에는 들어 있어야할 유골함대신 무게를 속이기 위한 돌 한 덩이와 접은 편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의혹의 여지없이 호남의 짓이었다. 양지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접힌 종이를 꺼냈다.

―언니야 놀랬재? 이해해라. 잿가루는 오빠랑 내랑 깨끗하고 좋은 장소에 가서 뿌릴 것이고 혼백은 사십구제 때까지 용연사에 모실 거다. 언니 니 좋다고 찾아왔던 사람인데 사십구제는 지내줘야 안 좋겠나, 시집도 안 간 처녀가 남의 골분을 안고 가서 장사 치게 할 수는 없다꼬, 아부지가 말하시는데 아부지는 역시 아부지다 싶은데 엄청 놀랬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하자. 언니 니 눈치 못 채게 하느라고 무척 힘들었다. 잘 갔다가 시끄럽은 속에 맑은 바람이나 쐬고 어서 와. 거기까지 간 것만 해도 돌아가신 분한테 보답은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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