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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산플러스 <165>산청 적벽·백마 월명산중국 적벽 능가하는 아름다운 경치에 풍류 즐기던 산
최창민  |  cchangmin@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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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2.21  15: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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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산플러스 <165>산청 적벽·백마·월명산
 
   
▲ 백마사 뒤편의 산죽지대


적벽은 중국 양자강 남안에 있는 기암절벽으로 유서깊은 곳이다. 삼국시대인 208년 손권과 유비 주유엽합군이 통일을 목표로 세력을 확장하던 조조에 대항해 승리한 전장이기도하다.

그로부터 870여년이 흐른 후 소동파(식)는 이곳을 찾아 당시를 떠올리며 ‘적벽회고’라는 시를 남겼다.

‘장강은 동으로 흐르고/ 물결은 다 씻어버렸네, 천고의 풍류 인물들을 <중략> 그림 같은 이 강산에 한때 호걸이 얼마나 많았던가/ 아득히 주유의 그때 일을 생각하니 <중략> 인생은 꿈과 같은 것, 한 잔의 술을 강물 속의 달에게 부어주네’

소동파가 47세에 지은 것으로 적벽대전을 회고하는 내용이다. 유배당한 처지를 서정적으로 묘사했다.

산청군 적벽산은 중국의 그것만큼 유서깊고 아름답다는데서 따온 것 같다. 우리나라에는 적벽산 외에도 이와 비슷한 화순적벽, 강원도의 적벽산, 평남 맹산군 적벽도 있다. 공통점은 모두 경치가 좋다는 것. 이런 절경과는 달리 이들이 이곳을 찾았던 배경이나 환경은 유유자적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소동파는 적벽에 유배됐고 신재 최산두도 화순적벽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산청 적벽산(赤壁·166m)은 유배지와는 거리가 멀고 중국의 적벽을 능가하는 아름다운 경치를 갖추고 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적벽강(경호)강에 모여 고단한 삶을 풀어냈다. 특히 소동파 적벽부의 뱃놀이를 모방해 가을 7월(음)기망(旣望, 16일)이면 강에 배를 띄우고 풍류를 즐겼다. 또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 우암 송시열은 강누에 유숙하며 ‘적벽’이라는 글을 남겼다. 이런 배경을 간직한 적벽·백마·월명산 등산은 역사의 묘미를 한껏 되살린다.

 
   
 
   
▲ 돌확


▲산청군 신안면 단성교 앞 삼거리 공터→적벽정→적벽산→3번국도 아래로 가로지름→백마사→망춘대→백마산→질매재→월명산→상사바위→회귀→하촌마을→적벽산·경호강 사이 도로 이용 도보 회귀.

▲산청군 신안면 단성교 앞 삼거리가 등산로 초입이다. 오전 10시, 이정표를 따라 산으로 곧장 오른다.

적벽·백마·월명산과 연계산행이 가능하다는 이정표가 곳곳에 세워져 있다. 토종소나무 사이로 가끔씩 오랜 수령의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 조화를 이룬다. 바위들은 여느 산과는 약간 다르게 검붉은 빛을 발하는데 원시적인 냄새가 난다. 언뜻언뜻 솔숲사이로 유려하게 흐르는 경호강과 그 위에 놓인 단성교, 맞은편 단성면 일대 전경이 펼쳐진다.

출발 후 10분이 채 안돼 통나무로 만든 누각 적벽정에 닿는다. 과거에는 유림들의 공간이었으나 요즘은 등산객의 쉼터가 되어준다.

어느 산악회에서 누각 앞에다 ‘지자요수 인자요산(智者樂水 仁者樂山)’이라고 새긴 표지석을 세웠다. 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말로 직역하면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의미다.

 
   
▲ 백마산∼월명산구간의 암벽
   
 


지혜로운 사람은 식별력이 높다. 자신과 맺어지는 인간관계에 관심이 많아 항상 겸허한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두루 흘러 맺힘이 없는 것이 물과 같아 물을 좋아한다. 반면 어진 사람은 의리를 중시해 중후하여 옮기지 않는 것이 산과 같다. 그래서 산을 좋아한다. 늘 자신과 하늘의 관계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모든 가치를 위에다 두고 있다. 고요한 성격이 많다. 스스로를 돌이켜 볼 말이다.

오전 10시 45분, 누각 앞으로 나아가면 난간처럼 돌출된 암석이 전망대 역할을 한다. 경호강의 유려한 곡선과 백마·적벽산이 만나 최고의 경치를 보여준다. 기억의 편린, 오래 전 적벽산 아래 경호강에는 해마다 희귀한 새가 날아들었다. 러시아에서 온 호사비오리인데 강이 조용하고 아늑한데다 맑고 수심이 깊어서 서식환경이 좋았다. 특히 강가 있는 대숲과 잡목숲은 먹이활동을 하지 않을 때에는 편안한 휴식처가 됐다. 어느 날 하상정리를 하면서 강이 파헤쳐지고 주변의 대숲이 사라지면서 이 호사비오리는 더 이상 날아들지 않았다.

산은 오르내림이 별로 없어 편안하게 산행을 할 수 있다. 국민체육진흥기금으로 설치한 신안동네 체육시설을 지나면 내리막길, 하산하면 임도와 3번국도가 시원하게 뚫려있다. 교량 아래를 지나 산 어귀에 주인 잃은 빈집이 몇 채 나온다.

한때 번성했던 마을이라 생각하니 가슴에 시린바람이 불어드는 것 같다.

 
   
▲ 백마산 망춘대
   
▲ 과거 병사들이 식수로 사용했을 웅덩이


곧장 산으로 붙는다. 한국환경민간단체진흥회와 지리산생태계보전실천운동연합회는 이 지역 일대가 담비(천연기념물 343호)의 숲임을 알리고 있다. 등산로는 조용한 백마사를 에둘러 산죽지대로 이어진다. 망춘대는 지나온 적벽산과 경호강 단성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

오전 11시 10분, 망춘대를 지나 올라가면 백마산 정상 가까운 곳에 신기하게도 웅덩이가 하나 나온다. 삼국시대부터 군사요충지로서 산성이 있던 자리인데 병사들의 고립을 대비해 파놓은 우물이라고. 이 외도 전망대를 세운 흔적인 돌확이 여럿 보인다. 실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강산석성(백마산성)은 …천연으로 된 험한 곳이 그 반이고 둘레가 150보이다. 안에 작은 못 2개, 작은 샘 1개가 있고 군창이 있다’고 돼있다. 요즘 산돼지의 놀이터가 됐는지 동물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백마산 정상(286m)을 지나 다시 고도를 낮춘다. 고도라고 해봐야 300m안팎이다.

그러나 백마산에 얽힌 이야기는 사실여부를 떠나 재미를 더한다.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백마산 정상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강 건너에서 이를 지켜보던 왜군은 산정에 물이 없으리라 예상하고 옥새작전을 펼쳤다. 의병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묘안을 짰다. 즉 망춘대 등 외부에서 잘 보이는 곳에다 말을 세워놓고 하얀 쌀을 말 등에 쏟아 부어 물이 많다는 걸 시각적으로 보여줬다. 이를 본 왜군은 물이 많다고 판단하고 되돌아갔다는 일화다. 의병장 곽재우가 왜적들을 속이기 위한 심리전술이었다는 얘기가 전한다.

정유재란 때에는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면서 남해의 전세를 살피는 길에 이 산에 올랐다. 장군은 이튿날 단성현에서 하룻밤을 유숙했다.

오전 11시 30분, 월명산 등산길은 암반과 바위가 많다. 지금까지는 주로 육산이었다면 이 지역만큼은 높은 바위들이 중력을 거스르는 듯 위태롭게 서 있다.

월명산(320m)정상은 넓은 암반이다. 지나온 적벽·백마산 경호강의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적벽 아래 강변에는 신안루·경연루·담분루 등 여러개의 누각이 있었다고 전한다. 경호강 끝의 넓은 호수가 진양호이다.

상사바위까지는 마사토 위에 키 작은 소나무가 군락을 이룬다. 소나무가 마치 분재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소인국의 정원처럼 정감이 넘친다. 낮 12시, 취재팀은 상사바위에서 반환해 하촌마을→적벽산·경호강 사이 도로를 따라 단성교에 회귀했다.

연재 송병선(宋秉璿·1836~1905)은 우암 송시열의 9대손으로 ‘단성 적벽의 천하절경을 본 것이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고 단진제명승기에 썼다. 을사조약 파기를 주장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그는 한때 단성 강누의 절친 권병구와 교유하며 우암의 적벽 각자 아래에 이름을 새겼다. 경호강 사잇길을 걸어 나오면서 천하절경이라는 하늘 위 적벽을 바라보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구덩이로 빠지고 말았다.

최창민기자 cchangmin@gnnews.co.kr

 
   
▲ 천연기념물 343호 담비가 사는 곳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gn20170209적벽산 백마산 (46)
백마산과 단성뜰 그리고 경호강, 더 멀리 보이는 호수가 진양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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