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장편소설]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0 (253)
[박주원장편소설]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0 (253)
  • 경남일보
  • 승인 2017.03.06 14: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0 (353)

망연자실한 손끝에서 종이가 스르르 흘러내렸다. 물에 떨어진 종이는 작은 파문을 일으키다가 이내 물결에 실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양지는 어금니를 지그시 물며 눈을 감았다. 추여사의 죽음, 아버지의 배려, 호남의 편지가 겹겹으로 어울렸다. 억눌린 듯 답답하던 가슴 사이에서 낮은 흐느낌처럼 심호흡이 흘러나왔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죽음이라는 것은 또 무엇일까. 허무라는 흔히 쓰는 단어를 가지고는 흩어버릴 수 없이 뭉친 것들이 너무 많다.

어이없이 어머니를 보냈건만 양지는 아직 그 죽음에 대해서도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추여사는 이승에 있었다. 입으로 소리를 내고 발로 움직이고 마음으로 뜻을 전했다. 그러나 불과 이삼 일만에 그의 흔적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머잖아서 그를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차츰 사라질 것이다.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은 무슨 의미로 이런 복잡한 요소를 갖추고 있는 걸까. 고통이라는 이름으로 질펀하게 가로 놓인 삶의 늪을 건너가는 동안 어떻게 하면 몸이 안전하고 마음이 평화스러울 수 있을까. 수많은 선각 지식인들이 탐구하고 실습해 왔다. 그러나 개개인, 특히 여자들은 양지 자신부터가 아직도 올바른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 추여사 역시 부지런했고 건전하고 바른 생활을 했던 사람인데 그의 일생이나 이런 비참한 죽음은 그의 삶에 대한 보상이 되지 못한다. 더구나 평범한 다른 사람들처럼 자식의 손에 의해서 소멸의식이 치러지지도 못했다. 이대로 속절없이 소멸시켜버리기에는 그녀의 인생이 너무 가련하다는 안타까움이 들어 강 사장이 만났던 누구라도 찾아가서 추 영자, 그가 이 세상에 살았었고 이제 저 세상으로 돌아갔음이라도 알려주고 싶었다.

어디선가 갈가마귀 떼 소리가 났다. 양지는 희뿌연 하늘로 눈길을 돌려 소리의 향방을 쫓았다. 조각 낸 검은 비닐처럼 가볍고 어지럽게 날아온 갈가마귀 떼가 건너편의 보리논에 내려앉고 있었다. 아까 나붓이 떠있던 하늘 가운데의 흰 구름은 그 사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빈 공간이 된 하늘만 휑하니 높다.

양지는 조금씩 사과상자를 찢어 물 가운데로 던졌다. 더러는 삐죽 솟아있는 돌 위에 얹혔으나 바람이 이내 채갔고 그래도 멈춰있는 것들은 뒤따라 온 물결이 쓸어갔다. 손가락 끝이 아팠으나 상자 찢기를 멈추지 않았다. 끝닿지 않는 설음의 중심이라도 파헤치기 위한 듯.

선은 흉내 내기 쉽지만 악은 흉내 내기 쉽지않다는 말이 있지만 양지는 그 쉽다는 선을 흉내 내기도 너무 벅차고 어려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