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덕유산 눈꽃 산행
[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덕유산 눈꽃 산행
  • 김귀현
  • 승인 2017.03.13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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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념무상의 길, 시련의 길 끝에 핀 상고대
◇덕을 베푸는 덕유산 눈꽃산행

눈꽃산행지로 유명한 덕유산, 눈 구경하기가 쉽지 않은 남부지방에서는 덕유산이 곁에 있다는 게 정말 다행인지도 모른다. 덕유산 겨울 산행을 서너 번 다녀왔지만 거창군 송계사에서 출발, 횡경재, 송계 삼거리(백암봉), 동엽령, 칠연폭포, 안성(통안)까지의 13.1㎞ 산행은 처음이다. 힐링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을 통해 끊임없이 이어짐으로써 마음속에 남아있는 부정적인 감정이나 일상생활에서 새롭게 만나는 스트레스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다. 이번 힐링여행은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즐기는 눈꽃산행과 더불어 어려움을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복잡하게 얽힌 내면의 아픔을 맑게 힐링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산악동호회 ‘더조은사람들’과 함께 떠났다.

덕유산의 원래 이름은 광여산이다.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전화(戰禍)를 피해 이 산으로 피신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왜병들이 이곳을 지나갈 때면 짙은 안개가 드리워 산속에 사람들이 숨어있는 것을 왜병들이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고 한다. 그 안개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참화를 면할 수 있었던 광여산의 신비로움을 보고 사람들은 큰 덕이 있는 산이라 하여 큰 덕(德), 넉넉할 유(裕)자를 써서 덕유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덕유산에 도착했을 때 처음엔 다소 실망을 했다. 온 산이 눈으로 덮여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왔는데, 눈은 보이질 않고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만 우리를 반겨 주었기 때문이다. 계곡물 소리를 따라 한참을 올라가자 길섶엔 아직 녹지 않은 눈들이 조금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다시 가파른 오르막을 치올라가자 선두에서 산행하는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길과 산이 온통 눈으로 덮여있었다. 아직 고지대가 아니라서 그런지 상고대는 보이질 않았다. 출발해서 3㎞ 지점인 횡경재 응달 켠에 이르자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상고대가 탐방객들을 반겼다.

 
▲ 소담스럽게 핀 눈꽃.


◇겨울나무가 피운 꽃, 상고대

영하의 기온에서 액체 상태로 존재하는 미세한 물방울인 구름입자나 안개입자가 나무 등의 물체에 부딪쳐 순간적으로 얼면서 붙는 현상을 상고대라고 하는데, 나뭇가지에 꽃이 핀 것처럼 얹힌 눈꽃과는 확연히 다르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피어있는 하얀 상고대가 색채의 대비로 인해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길도 나무도 산도 온통 하얀 색이었다. 길섶, 아무도 밟지 않은 숫눈을 향해 뛰어들어 무릎까지 빠지는 낭패를 당하고도 모두들 즐거워한다. 하지만 가파른 눈길을 걸어가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눈 쌓인 길을 걸어가는 탐방객들, 처음에는 환호성으로 눈을 맞이했는데 길이 점점 가팔라지고 발걸음이 무거워지면서 환호성이 한숨소리로 바뀌어갔다. 그러한 길을 다시 3㎞ 이상 걸어가자, 몇몇 사람들의 얼굴에선 처음 출발할 때의 설렘 가득한 모습과는 달리 후회와 고통의 얼룩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생에 어찌 고통만 따르라는 법이 있겠는가? 송계 삼거리인 백암봉(1503m)에 이르자, 지금까지 힘들어하는 표정은 사라지고 눈꽃처럼 활짝 얼굴이 피어났다. 힘들게 가파른 눈길을 올라올 때는 서로 대화마저 끊은 채, 오로지 산행에만 전념하다가 정상에 다다르자 환호성과 함께 온통 기쁨과 행복감에 젖어있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모두가 세상의 근심걱정 하나 찾아볼 수 없는 환한 모습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이겨내는 과정, 가파른 고개를 넘어가야한다는 집념으로 무념무상에 빠지는 이 순간이 정녕 힐링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가파르고 고통스러운 길이 곧 마음속에 담아둔 걱정거리나 상처를 비우는 비움의 길이면서 기쁨을 채우는 힐링의 길임을 깨달았다.

백암봉에서 동엽령 쪽의 내리막길로 내려서자, 지금까지 왔던 길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눈이 쌓여 있었다. 길바닥의 눈과 나무에 생겨난 상고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지금 인간 세상이 아닌 천상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더군다나 오르막이 아니라 내려오는 길이라 발품도 가벼워진 상태라서 그런지 마음은 하늘에 떠 있는 것 같았다.

길섶, 수리취 마른 꽃이 덧옷으로 입고 있는 눈꽃이 탐방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꽃이 졌는데도 꽃 못지않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피어있는 수리취의 눈꽃, 큰 나무 사이에 떼 지어 피어있는 모습이 추위를 견디며 새봄을 기다리는 민초(民草)들의 꿈처럼 보였다. 어찌 크고 유명한 존재들만 세상의 주인이겠는가? 저처럼 작고 야윈 수리취도 충분히 겨울의 주인공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꽃대궁처럼 곧게 뻗은 가냘픈 줄기 끝에서 겨울은 인내하는 모습이 참으로 성스럽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나무에 쌓인 눈의 일부가 햇살에 녹아 가지 틈에만 남아있는 눈의 모습이 마치 목화솜처럼 보였다.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상고대의 모습 또한 바다 밑 산호초를 연상케 하거나 사슴의 뿔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기품을 뽐내고 있었다.

 
▲ 눈꽃 핀 소나무와 덕유산 능선.



◇비움의 길이 곧 채움의 길이다

동엽령에서 칠연폭포로 내려오는 길은 처음엔 아주 급경사라서 눈 덮인 길을 내려오기가 녹록지 않았다. 그런데 한참을 내려오자 경사가 순해지면서 눈 쌓인 길이 마치 자연 눈썰매장처럼 변신해 있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반추하려는 듯, 가지고 온 비닐돗자리를 썰매 삼아 눈길을 타고 내려가는 탐방객들도 있었다. 썰매를 타 보고 싶은 마음에 줄을 서서 따라가는 풍경도 멋있었다. 썰매를 타고 싶었다기보다는 추억 속으로 빠져서 어린 시절에 느꼈던 행복을 다시 맛보기 위한 회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행의 참맛은 가파른 오르막에서 손을 맞잡고 함께 올라가며 더불어 사는 법을 익히고, 내리막길을 걸을 때는 말없이 우리를 받아준 산처럼 자만하지 않는 겸허한 발걸음을 익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마음을 비울 때 비로소 더 크고 넓은 세상 하나가 내 안에 가득 채워짐을 느낀 하루였다.

/박종현(시인·경남과기대 청담사상연구소 연구원)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핀 상고대.

눈 덮인 탐방로.
겨울을 이기고 있는 겨우살이들.
돗자리로 썰매를 타는 탐방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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