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위식의 발길 닿는대로 (91)해인사 홍제암
윤위식의 발길 닿는대로 (91)해인사 홍제암
  • 경남일보
  • 승인 2017.03.13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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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2월 초하루에 ‘바람 올리기’를 안 해서 영등할머니가 노하신 것일까, 버드나무 높은 가지 끝까지 물을 올리느라고 뒤흔드는 바람일까, 바람이 세차게 불어댄다. 대통령이 탄핵되고 사드 배치로 중국과의 관계까지 꼬여가며 나라 안팎이 시끄러워 바람 잘날 없는데 대선정국의 할거하는 군웅들이 전국을 들쑤시니 민심도 갈피를 못 잡으니 하늘인들 편하겠나. 고운 최치원 선생의 시무10조라도 되새겨보고 사명당 유정 송운대사를 찾아뵙고 싶어 가야산으로 찾아들었다.

언제 찾아도 홍류동계곡으로 들어서면 낙락장송 울창하고 기암괴석 온갖 형상 기묘하고 절묘하며 산은 높고 물은 맑아 세속을 멀리한 선경이요 절경이라 산수화의 병풍 속에 신선 같은 객이 되어 황홀경에 파묻힌다. 솔가지 스쳐가는 바람소리 청량하고 바윗돌 빗겨가는 물소리가 청아하여 거문고도 할 일 없고 가야금도 소용없고, 벼랑 끝에 난을 치고 천공에다 시를 쓰면 지필묵도 쓸 일 없고, 계곡으로 내려서면 석벽에도 바위에도 사방이 한시(漢詩)인데 서책인들 무엇하랴. 신선들의 별천지라 농산정에 좌정하면 영락없는 신선이고 반석위에 앉으면 시인묵객 따로 없고 소리길을 걸으면 속절없는 풍류객이다. 마음이 헤프면 정취에 넋이 뺏겨 해 가는 줄 모르니 계획했던 목적지는 해인사 말고도 골골이 암자라서 언제쯤에 닿을지 예상조차 못한다.

세상사도 잠시 잊고 사나흘쯤 머무르면 더 없이 좋으련만 미련만은 남겨두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길상암을 지나자 이내 성보박물관 앞의 널따란 주차장에 닿았다. 보현암 들머리를 지나 삼선암을 건너다보며 쉬엄쉬엄 걸어서 1km 정도나 왔을까 하는데 길섶 오른쪽으로 웅장한 석비를 등에 진 거대한 돌거북이 길게 목을 늘이고 속객을 반기는데 주변으로 즐비한 석비와 커다란 부도가 널따랗게 자리를 잡고 숙연한 분위를 엄숙하게 짓누른다. 석비는 장엄하고 웅장한 사리탑은 정교한 옥개석과 탑신의 섬세함에 조각의 문외한도 감탄이 절로 난다. 혜암, 일타, 영암, 명진 등 수많은 대종사 큰스님들의 비명과 부도의 안쪽으로 현대미술적인 석조각의 사리탑이 눈길을 끈다. 퇴옹당 성철스님의 부도이다. 퇴옹당 성철스님은 오늘의 시국을 두고 또 뭐라고 나무라실지 조심스레 다가가서 합장의 예를 올렸다.

해인사의 일주문 들머리에도 부도와 석비가 줄지어서 즐비한데 옆으로 빗겨 앉은 자그마한 연못이 시공의 틈새에서 고즈넉이 내려앉아 속객을 붙잡는다. 큰 산의 정상은 멀리서나 보이는 것인데 기이하게도 높고 낮은 준령들이 좌우로 비켜서고 낙목천공이 틈새를 열어주며 1430m의 가야산 정상의 바위봉우리인 상왕봉을 빤히 보게 한다. 하지만 천지창조의 오묘함과 선현들의 지혜가 어찌 여기서 멈추랴. 가야산 정상을 거울에 비추듯이 연못 속에 그 모습을 비취게 하였으니 그 이름이 ‘영지’이다. 영지의 물속에 비춰진 나뭇가지가 흔들거리고 해인사 당우의 용머리가 꿈틀거리는데 가야산 상왕봉이 보일 것도 같건마는 시국이 어지러워서일까 바람이 물결을 끊임없이 뒤흔든다.

해인사 일주문을 옆에 두고 곧장 홍제암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첩첩산중의 골짜기는 고산준봉들이 사방에서 조이는데 산비둘기 간간이 우는 소리에 까마귀가 화답하고 속객은 홍제교 위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우측은 3·1 독립선언민족대표 33인중의 백용성조사의 유적도량 용탑선원이 코앞이고, 좌측은 신라 애장왕이 해인사를 창건하려는 순응대사를 도와 잠시 머물렀던 원당암이 빤히 보이고 눈앞에는 사명대사께서 임진왜란의 7년 전란을 끝내고 수도하시다가 입적하신 홍제암이다.

좌우 암자는 후일로 기약하고 홍제암의 석축 돌계단으로 올랐다. 홍제암 정문인 삼 칸의 ‘보승문’이 돌계단을 마련하고 축대 위에 섰고 옆으로는 부도 넷에 석비 다섯이 가로줄로 늘어섰다. ‘해인사 사명대사 부도 및 석장비’ 라는 제하의 안내판 앞으로 다가섰다. 사명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석과 사리를 봉안한 부도이고 홍제암은 사명대사가 1608년 선조의 하사로 창건하여 말년까지 수도하다 입적한 곳으로 대사께서 입적한 1610년에 부도가 만들어졌고 비석은 1612년에 건립되었는데 1943년 왜인이 깨트린 것을 1958년에 복원한 것이라며 보물 제1301호라고 일려준다.

커다란 석장비 앞으로 다가섰다. ‘자통홍제존자유정대사석장비명’이라는 전서체의 비명이 가로로 음각되고 ‘유명조선국자통홍제존자사명송운대사석장비명’으로 시작되는 새까만 오석의 빗돌은 귀부의 거북등에 곧추서서 용틀임이 양각된 하얀 화강암의 머릿돌을 얹었는데 빗돌은 정확하게도 네 쪽으로 쪼개어진 것을 다시 이어 맞추었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이 지은 비문인데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고 왜인 경찰서장의 만행이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나란한 네 기의 부도에는 홍제존자라는 명문이 없어 돌계단으로 오르게 한 언덕배기의 부도를 찾았다. 사각의 밋밋한 지대석과 복연을 새긴 원형의 기단석이 하나의 돌로 된 위로 석종형의 탑신을 올리고 연꽃봉오리 모양의 보주도 탑신과 하나의 돌인데 명문의 흔적이 어디에도 없지만 사명대사의 부도이다. 왜인의 훼손을 막기 위해 미리 명문을 지웠다니 가슴 아픈 역사이다. 합장의 예를 올리고 홍제암의 정문인 보승문으로 들어섰다. 육환장을 길게 잡고 당당한 풍채에 근엄한 용모로 장삼자락 드리우신 긴 수염의 대사께서 불꽃 튀는 안총으로 나라꼴이 뭐이냐고 대갈하실까 졸인 가슴 일순간에 안도하고 합장하고 고개를 숙였다.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구하고자 장삼자락에 피를 묻히신 승장 사명대사가 입적하자 광해군이 내린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를 따서 이름 붙인 홍제암은 고난의 역사를 고색창연한 옛 내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

석축 위로 길게 늘인 건물은 웅장하여 위엄 있고 엄숙하여 장엄한데 온화하여 포근하다. 법당은 축대 위에서 정면은 일곱 칸인데 좌우로는 아름드리 기둥을 세우 법당과 평면이 되게 2층 누각으로 돌출시켜 툇마루로 연결시킨 특이한 구조이고 기둥위의 공포도 공간마다 모양이 다르고 기둥과 기둥의 간격도 달라 공간의 크기가 다른데도 균형의 조화가 안정감을 이루고 있어 절묘한 짜임새에 감탄이 절로 난다. 보물 제1300호라니 고개가 절로 끄덕거려진다. 법당으로 들어서 예를 갖추고 향을 사르며 구국애민의 승장 사명당 송운대사의 유지를 가슴에 되새긴다.

 
홍제암
사명대사 사리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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