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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415)<175>탄생 100년을 맞는 시조시인 아천 최재호(3)
김귀현  |  k2@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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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3.16  21:2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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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천 최재호는 문인으로서 만난 동료문인으로는 서정주, 이원섭, 이주홍, 전광용, 설창수, 이경순, 김상옥, 이동주, 송영택, 오학영, 유성규, 이태극, 정진업, 박노석, 구 상, 유엽, 박재삼, 이형기 등이었다. 그밖에도 수없이 많은 문인들이 진주를 거쳐갈 때 아천을 만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다. 그만큼 아천은 품이 넓었다.

아천이 개천예술제에 직접 관여하고 있을 때는 파성 설창수가 5.16이후 참의원, 개천예술제 등에서 밀려난 앙금이 채 가시기 전인데도 인간적으로는 서로 대화를 터놓을 수 있었던 몇 안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다. 당시 경남일보 김윤양 사장의 경우도 아천과 같이 파성 설창수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며 인간적 교감을 하고 있었다.

아천은 삼현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육도시 진주에 사학의 깃발을 올렸다. 그때도 인재를 쓰는 용인술을 보여주었는데, 특별히 시인 교사를 발탁하여 인문계 학교의 자리잡기를 시도했다. 부산일보 신춘문예(1965)와 월간 현대문학(1967)으로 데뷔한 김석규 시인과 동아일보 신춘문예(1965)로 데뷔한 박재두 시조시인을 영입하여 양날개로 삼은 것처럼 보였다. 이 두 시인은 공교롭게도 부산사대 미술과를 나온 사람인데 다같이 미술교사이지만 화가의 길은 접고 시인의 길로 들어선 경우였다. 김석규 시인은 서양화 전공이었고 박재두 시인은 동양화 전공이어서 각론에서는 빛깔이 달랐다.

이때의 두 시인은 그후 교육계의 중진으로 성장하여 김석규 시인은 울산 광역시 교육청 학무국장으로 퇴임했고, 박재두 시인은 현혀여자중학교 교장으로 재임하다가 교육계에서 순직했다. 이 두 시인교사는 시인의 길에서도 충분히 대가로 성장하여 시단과 시조단의 한 영향력을 주는 업적을 남겼다. 일찍이 이 학교에 봉직한 모더니스트 이덕 시인을 기억할 수 있고, 한국일보 신춘 출신인 김창근 시인, 문학과지성 신인 출신 김인배 소설가, 흑기 동인 강동주 시인, 현대문학 출신 박종현 시인 등 일일이 거명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작가들의 교사로 포진해 왔음을 기억할 수 있다. 그리하여 중앙에서 문예반 컨테스트나 학생문인 경연에서 발군의 실력으로 언필칭 문학예고를 제치는 결과를 보이기도 했다. 지금 아천의 문학계 업적을 말하는 자리이어서 이 학교의 일반적인 약진이나 기능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못해 아쉽지만 하나를 보면 다수를 알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해 주길 빈다.

아천의 첫 시조집 ‘비취단장’은 절판이고 둘째 시조집 ‘아천시집‘은 고희기념집인데 표지의 제호는 김상옥 시인이 쓰고, 책머리에 ’송수 아천 사형‘이라는 제목의 축하시조를 썼다. “내내로 흘러 흘러 七十이 되시었소/ 다시 내내 흘러 七十을 누리시고/ 온(백) 칠십 골(만) 七十으로 무궁무진 살으소” 앞으로 백칠십, 만칠십으로 무궁무진 살으시라는 축수의 시다. 앞 화보자리에는 저자의 자필휘호가 있고, 월전 장우성 화백의 축화, 일중 김충현의 축서가 가지런히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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