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1 (358)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1 (358)
  • 경남일보
  • 승인 2017.03.13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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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1 (358)

하지만 양지는 정자어멈이 정자랑 불화한다며 이러저러 해달라던 노파의 부탁이 꺽쇠처럼 뇌리에 박혀 욱죄이는 걸 느꼈다 자신이 잘되기를 바라는 이면에는 항상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릴 거라는 나름의 내약이 있었다. 다 같은 여자로서 여자의 상처를 이해하고 치유해줄 사람은 같은 여자, 그것도 자신의 배를 빌어서 난 딸밖에 없다는 생각 말이다. 그런데 실제로 서로의 속내를 환히 꿰뚫고 있는 어머니와 딸들은 그렇게 정답지를 않았다. 어느 날이 될지 알 수는 없어도 이해와 화해의 날이 되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처럼 빡빡한 감정의 고리는 벗겨내지도 못한 채 어머니들은 먼저 영원한 거리 저쪽으로 훌쩍 자리를 옮기고 만다.

어이딸이 자매처럼 신구 세대의 지혜를 나누며 오손도손 산다면 얼마나 분위기는 화락할 것이며 생활 또한 풍요하고 아름답게 발전해 갈 것인가. 그렇지만 양지 역시 어머니가 병든 것을 알지 못했다면 어머니의 관을 두드리며 통곡할 때까지 그 나마의 거리도 좁히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생의 종막에 이르렀다는 절박한 인식과 함께 쭈그러진 주름살만큼이나 노인들의 욕구와 기대는 강렬해 질수 있다. 정자어멈의 그런 기대를 못 맞추어 드린 정자 개인의 어떤 말 못할 사정도 있을 것이지만 석류나무집 노파의 말처럼 늙은이를 편안하게 해주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낳고 기른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는 젊은이들 탓으로 돌려진다.

어른들은 큰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거저 자주 연락해서 안부를 묻고 살갑게 대해주는 거라고 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자식들은 실기한 뒤에야 깨닫고 후회하면서 사죄를 한다. 부모들이 자식에게 자신의 정수리를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헛기침을 하듯이 자식들 또한 자신이 무능해서 타개하지 못하는 현실의 어려움을 감추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서로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얼버무리는 말에 힘입은 자식들은 저 사는데 몰두해서 고향도 부모도 잊고 지낸다.

얼마쯤 가다가 양지는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어디선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돌아보니 작고 야무진 체구의 어머니가 보였다. 양지가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어머니도 자리를 옮겨 천지사방으로 날아다닌다. 심지어 흔들리는 나뭇가지나 흐르는 물에도 어머니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칭찬하던 요조한 모습은 아니다. 머리는 여전히 업수건을 썼고 아랫도리는 일하기 좋게 조여 맨 허리끈 때문에 깡동한 조리치마 그대로다. 최선을 다해 살았으니 후회는 없다던 그이. 생전 처음 가져 보는 신뢰와 묵지근한 그리움으로 가슴 깊은 곳이 절절해졌다. ‘인자부터 너거는 잘 될 거라’던 예언도 갑자기 되살아나 뇌리 속을 뒤흔들었다.

양지는 순간 가슴 한 복판을 날카롭게 할퀴고 가는 통증을 끌어안고 현기증의 기습까지 받았다. 까모록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이래선 안 되는데 하는 강한 반감이 솟구쳤다. 하지만 그녀는 젖은 이불처럼 강하게 덮쳐오는 어떤 힘을 이기지 못한 채 아픈 쪽으로 부드러움을 보내며 온몸을 웅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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