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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416)<176>탄생 100년을 맞는 아천 최재호 시조시인(4)
김귀현  |  k2@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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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3.24  02: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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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천 최재호 시조시인의 이름 자리에 대치되는 직함은 언론인, 교육자, 각종 사회단체장 등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직함들을 놓고 보면 그는 지역사회를 이루는 시설물 같은 총체성의 의미를 띠고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적어도 1960년대 이후 1980년대까지 진주지역 전반에 영향력을 주는 주도적 인사였다. 최재호의 전반기는 경제인으로 진주전분, 한양양조 사장을 거쳤고 그 이후는 앞에서 나열한 직분들에 고루 관여하게 되었다.

직장 개념으로 아천의 생애를 말하라 하면 교육자의 길이 본업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1940년에서 1954년까지 초중등 교사로 살았다. 양보초등, 하일초등, 진주사범, 부산해동중학을 전전했다. 이후 해인대학(경남대 전신) 강사를 거쳐 경남 교육위원, 중앙교육위원을 거쳤다. 아천이 해인대학에 강사로 발탁해 준 사람은 당시 해인대학장(후에 동국대 총무처장) 김상조였다. 김상조 학장은 함양군수를 지낸 문화재전문위원 김상조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김상조 학장은 만년에 귀향해 있을 때 아천이 그의 해박한 한문 실력을 아는 터라 우정으로 삼현여고 도서관 고서 자문역으로 일감을 맡겼다. 아천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아천은 본격적으로 중등학교 교장의 길로 들어선 것은 언론인으로서 경남일보 사장을 지낸 다음이었다. 그가 경남일보사장을 지낸 시기는 문인협회 진주지부장 시기와 겹친다. 진주해인고등학교(후에 동명고교) 교장을 지내고 이어 진주동중학교 교장을 거친 다음 그는 사학 설립자로서 교육의 사학다운 사학의 꿈을 펼치는 기회가 왔다. 스스로 ‘삼현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 운영하게 된 것이다. 학교 이름을 삼현(三賢)이라 붙인 것은 여성으로서 갖는 가치의 실현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현민(賢民), 현모(賢母), 현처(賢妻)가 그 삼현이다. 전통적 가치이지만 시대를 바꾸어 놓고도 그 가치는 바래질 수 없는 것이 아닐 수 없다.

1970년대 후반일까, 문인들 모임에서 술자리가 되었는데 아천은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언론사 사장을 할 때에는 공식석상에서 도단위 기관장, 일테면 도지사, 교육감 등과 동렬에 놓이는 배석의 예우를 받았는데 기막히게도 고등학교 교장이 되어 교장 그룹 자리에서 내 자리를 앉고 보니 도단위로부터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위상이 바뀐 것을 알고서부터 반대로, 교육이라는 것이 행정단위 예우로는 시야에 들지 않지만 후세 교육의 성스러운 자리라는 점에서는 더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는 자부심을 지닐 수 있게 되었어요”라 하는 것이었다. 아천은 이 시기에 진주시교육회장, 진주시사학교장회장 등을 맡아 교육 공동체의 연대와 지역교육의 현장 가꾸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 번은 어디 주최인지는 자세히 떠오르지 않지만 전국단위 문학강연회가 진주에서 있었다. 서울대 전광용 교수(소설가). 부산수대 이주홍 교수(소설가) 등이 연사로 참여했는데 아천이 이날 저녁 회식을 베풀었다. 그 자리에는 당시 서울대 교무처장이었던 전광용 교수를 보기 위해 진주시내 각 고등학교 교장단이 대거 참여했다. 그때 그 교장단은 서울대 교수에게 금년도 입시 경향에 대해 집중적으로 질문을 했다. 그제나 이제나 입시는 입시, 교무처장이라고 딱 부러지는 대답을 어찌 다할 수 있었을까 마는 이런 자리를 아천은 즐거운 마음으로 펴 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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