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1 (368)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1 (368)
  • 경남일보
  • 승인 2017.03.29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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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1 (368)

딴에는 어지간히 참고 살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썩은 음식이 발효하듯 질정 없이 뿜어내는 호남의 말속에도 일리 있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

“호남아.”

양지는 호남을 제지시켜 놓고 가만히 있었다. 냉정해진 눈길로 일목요연해지는 호남의 장래를 읽는다. 호남이 더 넓은 세상을 살아보았더라면, 더 많은 남성들과 교제를 해봤어도 지금과 같은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매스컴 타는 독신여성학자들의 지식을 제 것인 양 착각하고 인생을 걸려 한다. 기름독 깨고 풀밭에서 깨 줍는 년. 이혼한 여자가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뭇사람들의 사랑을 구걸하는 것을 보고 나이 든 어른들은 혀를 찬다. 안타깝게도 호남은 침착하게 깨를 주워 엎질러 버린 기름을 벌충할 만큼 참을성이 없다.

“너무 그렇기 얕보지 마라, 나도 알만큼은 알고 있다. 그만큼 잘 살아나갈 능력 있는 건 언니 니도 안다 아이가.”

수위를 모르고 뻗쳐있는 호남의 기를 눌러야할 필요를 느꼈다. 양지는 매서운 시선으로 호남을 쏘아보며 야젓잖게 나무라기 시작했다.

“기술도 자격증도 없는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노? 기껏 음식점에서 그릇 씻고 술잔이나 나르는 것? 너 세상을 몰라도 정말 너무 잘 모르는 구나. 너나 나나 너무 헛살았어. 내 방식은 그게 아니야. 내 동생인 너도 그래.”.

무슨 말엔가 비위가 틀린 모양 호남이 똥그래진 눈으로 양지를 흘겨보았다.

“몰라. 많이 배우고 똑똑한 언니랑 내가 우찌 같을 끼고, 복장 지르고 참말 그랄래?”

“심지도 없이 말은 나오는 대로 함부로 더풀더풀 내뱉고.”

그리고 양지는 짐짓 새된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자신에게서 간과되고 있었던 한 가지 부끄러운 사실이 제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저 아이를 나무랄만한 자격을 나는 갖고 있는가.

“난 그래도 썩지 않은 씨감자 겉은 언니보다는 낫다.”

호남이 대뜸 양지의 정곡을 찔렀다. 겉으로는 유들유들하게 굴었지만 적잖이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 벌겋게 약이 오른 얼굴로 마주 쏘아본다. 썩지 않은 씨감자. 감자 꽃이 하얗게 핀 감자밭에서 주렁주렁 끄달려 나올 햇감자를 연상하며 감자줄기를 당겼을 때를 경험으로 떠올리는 일은 어렵지 않다. 어이없는 호남의 반격에 선웃음이 나왔다. 불구스럽고 묘한 수치심이 일었다. 씨감자가 썩지 않은 감자줄기는 열매를 맺지 않았다. 뭐라고 변명이 필요한 부분이었으나 할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내 말은 언니 니가 내 대신 흠 없이 잘 살아 달라는 뜻이지 별 뜻은 없다.”

제가 한 말에 노처녀 언니가 너무 충격을 받았으리라 여겼는지 호남은 서둘러서 제가 짓찌른 곳에다 약을 발랐다. 분위기가 써늘했으나 양지는 아무렇잖은 듯 호남의 말을 들어 넘겼다. 지금은 호남의 당면 문제만을 논하는 것이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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