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1 (384)
호남은 다시 놀라움에 찬 시선을 양지에게로 던졌다. 비로소, 과격한 언동으로 딸들을 비난하던, 뻔뻔스럽기조차 하던 아버지의 당당함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참으로 어이없는 시작이었고 결말이라는 비명이 호남의 입에서 쏟아졌다.
“그라모 우리는 우짜라꼬! 누 때문에 내 인생이 이리 쪽났는데.”
억울해 못살겠는 듯 호남이 울부짖었다. 아버지가 잘못 놓은 징검다리에 빠져 파경을 맞고 표류하는 제 인생이 새삼 억울할 법도 했다.
여건도 안 되는 아버지가 서툰 손놀림으로 우유병을 소독하고 분유통을 고르는 일은 지속되어서 안 되는 일이었다. 늙은 아버지는 물론 어린아이에게도 적잖은 고통이 주어질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여자가 아이를 찾아간 양심이 두 사람의 고통을 빨리 제거해 주려는 따뜻한 배려에서만은 아닐 것은 사실이다. 호남은 엿기름을 걸러 마시고 마이신을 사서 먹어도 삭지 않고 팅팅 부어오른 유방의 아픔을 참다못해 유축기 대용으로 아이를 데려간 게 분명하다고 우겼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야릇한 감동으로 양지의 가슴 깊은 곳에는 작은 흔들림이 일었다.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던 인식엄마. 한 자식을 살리기 위해 한 자식을 낳았다고 절규하던 악에 받친 음성도 선연하게 상기되었다. 아이를 되찾아 안은 어미나 꿈에 그리던 평온함을 되찾은 안온함으로 아기 특유의 유순한 모습을 간직한 채 잠들어 있을 지도 모르는 아이의 모습이 복원된 명화의 한 장면처럼 그려졌다. 그것은 왠지 모를 안도감이었다. 온통 일그러진 것 투성이던 인식이네의 환경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데 그 와중에서도 버렸던 자식을 되찾아간 모성의 정체로 인해 상처에 돋는 새살을 확인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형편은 아버지의 돈 천 오백만원 정도로 절대 해결될 리 없이 막막하다.
“언니가 찾아가니 거짓말해서 우리 돈 옭아낸 양심가책을 받았을 까요?”
“큰애가 잘 안된 모양이야.”
“사기도 엄청난 사기를 쳤으니 끝이 좋을 리 없지.”
납득 안 되는 상황을 되새김질 하던 호남이 대뜸 결론을 내렸다.
호남의 화풀이를 이해시키듯이 오빠가 덧붙였다.
“돈은 버는 대로 갚는다꼬 했지만 한두 푼 하는 푼돈도 아닌데 그 돈이 쉽게 돌아오겠나.”
납득 안가는 표정을 지은 호남이 답을 구하기 위해 양지와 오빠를 둘러보았다.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않자 실내에는 벅찰 정도의 침묵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홀 맺힌 매듭처럼 온 가족을 언제까지나 힘들게 하지 않을까 싶던 일이 호남이까지 알게 되자 순식간에 스르르 풀려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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