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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421)<181>문인들이 선호하는 경남지역 속의 소재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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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4.27  22:5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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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는 1956년에 일어났던 헝가리 민주화운동에서의 소녀의 죽음을 소재로 시를 쓰면서 그때 폭압과 살상으로 일관했던 무자비한 소련군의 침략에 대해 의분을 감추지 않았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이승만 정부의 폭압과 학생들의 의거와 죽어간 학생들의 꽃다운 피를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 문단에서는 순수시인인 김춘수가 시대 사회에 대한 고발 성격의 시를 쓴 것에 대해 의아해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 분들에게 김 시인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이야기는 얼마간 설명이 될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어찌 3.15의거 최초의 시를 쓴 시인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을까, 하고 놀라는 마음이 된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베꼬니아의 꽃잎처럼이나>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남성동파출소에서 시청으로 가는 대로상에/ 또는/ 남성동파출소에서 북마산파출소로 가는 대로상에/ 너는 보았는가....뿌린 핏방울을,/ 베꼬니아의 꽃잎처럼이나 선연했던 것을..../ 1960년 3월 15일/ 너는 보았는가.....야음을 뚫고/ 나의 고막도 뚫고 간/ 그 많은 총탄의 행방을.....// 남성동파출소에서 시청으로 가는 대로상에서/ 또는/ 남성동파출소에서 북마산파출소로 가는 대로상에서/ 이었다 끊어졌다 밀물치던/ 그 아우성의 노도를/ 너는 보았는가....그들의 앳된 얼굴모습을....../ 뿌린 핏방울은/ 베꼬니아의 꽃잎처럼이나 선연했던 것을.....”

이 작품은 거듭 말하거니와 3.15의거가 일어난지 13일 후에 부산에 있는 국제신보(1960.3.28.) 지상에 발표되었다. 이때부터 부산 경남 대구권 일간지에서 3,15의거 시작품들이 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제신보는 선구적이라는 평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무렵 국제신보에는 하동출신 이병주 소설가가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였다. 이병주는 해인대학(경남대 전신) 교수로 있다가 1955년 부산 국제신보로 옮겨갔기 때문에 김춘수(갓 경남대 교수 발령)와는 앞면 정도는 트고 있었을 것이 아닌가 한다. 어쨌든 국제신보의 지향이나 필진은 이병주 선에서 결정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니까 김시인의 <베꼬니아의 꽃잎처럼이나>는 이병주 국장(혹은 주필)의 손에 의해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소설가 이병주는 그 다음해인 1961년 5.16이 나고 필화사건에 휘말려 혁명재판소에서 10년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2년 7개월 간의 옥고를 치른 다음 석방되고 난 뒤 언론사로 돌아가지 않고 소설가로서의 새로운 역정을 시작했다. 김춘수는 1년후 경남대에서 경북대로 전출해 갔다. 그런데 김춘수의 작품은 그 이후 3.15와 관련된 유족이나 부상자들의 암송시로 자리잡았다. 3.15기념사업회 관련자들은 김 시인의 작품을 읽으면서 위안을 삼았다고 한 것을 보면 그 점 확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2001년 12월 27일에 설치된 <국립 3.15묘지 설치 기념시비> 1차사업 10편 선정이 될 때 <베꼬니아의 꽃잎처럼이나>가 문제가 된 일이 있다. 김시인의 국회의원 전력이 거론이 되었으나 그 시를 읽고 3.15이후를 살아낸 분들의 강력한 천거에 의해 설치하는 쪽으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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