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2 (400)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2 (400)
  • 경남일보
  • 승인 2017.03.2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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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2 (400)

나이 든 어른이 아이들처럼 엄마라는 호칭을 쓰는 것도 비감에서 우러나는 분위기를 일깨운다. 양지는 되도록 일반화한 화제를 만들어내야 할 필요를 느꼈지만 서두는 얼른 찾아내 지지 않았고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니까 사랑의 화살이 두 분을 적중시켰겠죠. 두 분의 로맨스를 시대가 그렇게 짓밟지만 않았어도…. 참 이런 질문은 송구스럽지만 고모부님은 그 후 어떻게 사셨을까요?”

“할아버지는 세상 떠날 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계셨는데 주위로부터 들었지. 강원도 어느 산중에서 생을 마감하셨는가봐. 어릴 때의 희미한 기억으로 낯 선 어떤 스님이 찾아와서 놀고 있는 나를 한참 바라보다 간 적이 있는데 그 분이 그 분이구나 짐작만 했지. 아무리 되짚어 봐도 훤칠한 엄장하고 회색 장삼만 떠오를 뿐 얼굴은 통 기억에 없어.“



높낮이 없이, 편견 없이, 사랑하는 이들 모두 이별 없이 잘 살 수 있기를. 오빠는 이미 이 목표를 기준 삼아 자신이 투척할 생명의 값을 정한 것이다.

한이 힘이라고 했다. 한이 없는 사람은 목표도 추진력도 미약하다. 진주정신으로 형평운동을 되살려 내고 싶다는 오빠 장 현동. 그는 평등과 화목 세상을 만들라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사람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니 불편부당한 옛날의 역사 속으로 끌려드는 감당 못할 버거움이 일었다. 산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요도 한몫 거들었다. 오빠가 관심 가질 화제를 떠올리며 양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 저녁 한 숨도 못자고 자료집을 읽었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시대나 유교가 지배하던 조선시대에도 고기는 다 먹고 살았을 텐데 짐승을 잡거나 살생하고 고기를 다루는 일을 불결하게 여기고 그런 사람들에 대한 살벌함 때문에 거리를 두는 관습이 굳어졌던 거겠죠. 이렇게 직업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집단의식으로 굳어졌고 그에 대한 차별도 사농공상 시대에서 더욱 심해졌겠죠. 그러므로 아주 옛날부터 긴 세월 동안 인간 이하로 받아 온 차별의 관습은 그들 스스로의 체화가 되었고 강고한 사회의 벽을 길래 저항 못한 취약집단의 속성상 혼란스러운 사회의 흐름에 휘말린 채 형평운동은 사양화에 이르지 않았나 보여졌어요. 그런데 오빠가 그 놀랍고 신선했던 인권운동을, 이 시대의 진주정신을 일깨우는 촉매로 발굴한다니 너무 자랑스럽고 감동 했어요.“

매우 흐뭇하고 긍정적인 표정으로 키 작은 양지를 굽어보며 끝까지 듣고 있던 오빠가 슬며시 손을 뻗어 양지의 손을 잡았다.

”내가 아직도 천민 백정으로 보이지는 않지?“

”아유 그럼요. 그런 농담의 말씀이 어떤 자신감에서 나오는지 저는 알겠는데요. 오빠처럼 이 도시의 의식 있는 유지에게 설마 그런 망언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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