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2 (404)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2 (404)
  • 경남일보
  • 승인 2017.03.29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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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2 (404)

저 염주를 한 바퀴 다 돌리려면 제법 시간도 걸리겠다 싶은데 고요한 순간을 휘장 걷듯이 주승의 목소리가 들린다.

“차 드시지요.”

주승은 이미 단주가 걸린 손목의 옷자락을 다른 손으로 조금 걷으면서 양지 앞에 놓인 잔에다 미색의 차를 따르고 있다. 양지가 마신 잔에다 말없이 주승은 차를 따르고 양지는 꼭 그래야 되는 것처럼 한 잔 두 잔 차를 마셨다. 남루하게 피로한 기색인 양지의 치유를 돕는 보약인 듯 주인은 말없이 천천히 선약 대접을 하고 손은 또 말없이 그 약 대접을 받는 모습이다. 이윽고 목이 깔깔해지는 느낌을 받은 양지가 들고 있는 찻잔을 내려다보고만 있는데 무언의 설법 중인지 정좌한 승려도 말이 없다. 적막한 산골의 곳곳을 순찰 돌듯 뒤꼍 어디선가 고양이 소리가 났고 심심하다 내지르는 까마귀소리도 산중 어디 먼 곳에서 까욱까욱 날아왔다.

“이것도 좀 드시지요.”

책더미 이쪽의 차반에 놓여있던 배와 사과를 깎아 놓으며 주승이 침묵을 깼다. 경을 읊으면서 닦여진 음성이리라. 낭랑하면서도 부드럽다.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인연으로, 절집에 오신 손님에게 하는 공양 한 마디 더 보태서 대접해도 되겠습니까?”

양지를 위한 주승의 미사려구다. 그러시라고. 언어를 만들어 내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그런 마음이 담긴 양지의 눈길은 승려의 가슴에 걸려 있는 염주의 한 부분을 향했다.

승속의 이질적인 경계를 어떻게 접해야 될지 조심스러운 양지에게 주승이 만들어 낸 소탈한 분위기는 정갈하게 차만 마실 때보다 훨씬 부드럽고 넉넉하게 거듭난다. 그 바람에 양지도 무릎 꼬고 있던 다리를 풀어 편한 자세로 고쳐 앉았다.



“먼 길을 에둘러 오신 피로함이 역력한데 제 말이 틀리지는 않지요?”

찻잔을 감싼 손에다 양지는 가만히 힘을 주었다. 오빠가 부탁했을 것이다.

“스님, 제 주변에서 저를 아껴주던 분들이 갑자기 왜 이렇게 자꾸 떠나는지 무섭고 불안해요.”

“허허, 죽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까? 같은 차를 타고 가던 사람이 자기 내릴 곳에서 먼저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잘 가라, 내일 어디 어디서 또 보자 그런 약속이나 인사를 못하고 헤어지는 것 뿐. 제가 아는 어떤 이는 전화도 편지도 전달 안 되는 먼 나라로 이민을 갔다 생각하며 단절의 슬픔을 이기기도 한답니다.”

“아, 그런 방법도 있겠네요.”

“보살님은 인연이라는 거대한 인드라망에 대해서, 지금 자신이 존재해 있는 이유나 환경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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