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3 (415)
“저 역시 그런 일은 처음인데 괜히 오빠한테 폐끼치는 짓만 하지 않을까 싶어서예.”
“장 노인하고 김 씨가 있으이 자네는 몸 쓰는 일 말고 그 사람들하고 어울려서 목장 일 전반을 나 대신 좀 맡아보면, 어쩜 적임자일 것도 같은 생각이 지금 드네. 자네라면 나보다 더 잘할 것 같은 믿음도 있고.”
마음을 붙이면 어디서든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말한 지 아직 몇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 터전이 만들어졌다. 양지는 묵은 체증이 풀리는 듯한 기꺼움으로 두 손을 마주 잡고 싹싹 비볐다. 왠지 앞날이 잘 풀릴 것 같은 징조 아닌가.
오빠네의 일을 도우기로 거처가 정해지자 양지가 다음으로 해야 될 일의 차례가 딱 정해졌다. 도서방이 누나 집에 맡겨놓은 주영을 데려와 내 거처에서 같이 지내도 된다. 어릴 때 겪었던 저의 아찔했던 몇 날을 떠올리면 주영을 에워싼 예감은 자꾸 불상사 쪽으로 기울고 안달 나게 만드는 데 따른 결론이었다.
혼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주영이 얼굴부터 떠올랐다. 이모. 모이 먹는 새처럼 앙증스러운 그 작은 입을 쫑긋거리며 살포시 안겨들던 주영의 곰살스러운 모습을 품에 안으면 허한 가슴이 채워지고 펄펄 생동감이 펌프질 될 것도 같았다.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돌아눕는다. 주영이가 지금 겪고 있을 외로움과 슬픔을 생각하면 가슴부터 저렸다. 어린아이가 당해서는 안 될 고통이다. 그건 모두 어른들의 잘못이다.
양지는 제 외로움으로 인해 주영의 외로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잘 이해한다,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으면 주영을 돌보는 일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합심한 자식들의 간절한 바람으로, 갈라섰던 부모가 화해를 한 예는 많았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슨 희생이든 달게 받아들이는 것이 부모 된 사람들의 진실 된 모습이다. 그러나 주영은 아직 어렸고 봄 저수지의 개구리떼처럼 같이 모여서 운 힘으로 부모의 마음을 돌려 세울 형제자매도 없는 혈혈단신이다.
작년 가을에 비하면 불과 몇 달 상관인데도 자신의 인생관에 이런 변화가 올 줄 자신도 미처 몰랐던 양지다. 사람이란, 가족의 정이란 어떤 위협적인 상황 아래서도 변질되어서 안 되며 깨어져서는 절대 안 되는 사람살이의 근본이다. 옷 밥 문제만 해결되면 아무 탈 없이 잘 살 것 같던 그런 사소한 감정 문제들이 생활환경이 풍족해지는 반면으로 더 복잡한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이런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나. 영원히 해결 안 될 아이러니다.
양지는 자기 보호력 하나 갖추지 못한 어린아이가 세상과 맞서야하는 끔찍한 현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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