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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3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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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6.13  23: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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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3 (417)

촌뜨기 티를 내지 말아야 한다. 높은 건물이 몇 층인지 고개 들고 헤아리지 말 것, 기죽어서 고개 숙이고 걷지 말 것, 어리숙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웃지 말고 입술을 꼭 야무지게 다물 것, 아무리 신기한 게 보여도 늘 보는 것처럼 예사롭게 지나칠 것, 고개를 빳빳이 들고 허리는 쪽 펴고 걸을 것, 두 무릎이 살짝살짝 스치는 식으로 두 다리를 길게 앞으로 뻗어서 당당하게 걸을 것, 정수리에 물 컵을 얹고 걷는 듯이 발끝으로 사뿐사뿐 걸어야지 뒤꿈치로 땅을 콱콱 박으며 터덜터덜 걷지 말 것 등 스스로 실행해야 될 행동도 정해놓았다.

양지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영등포를 가려면 어디서 차를 타야하느냐고 물었다. 지금은 아무런 관계도 아닌 주인 선생님의 동생, 아니 양지를 이 지경으로 내 몬 할머니의 딸이 사는 곳이다. 틈입할 곳 없이 마주 선 유리벽 같은 서울에서 별로 눈여겨 읽지도 않았던 그 주소가 언뜻 떠오른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자신의 총기가 무한 자랑스러운 양지는 아주 당당한 음성으로 물었지만 그녀가 가야할 곳으로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인심은 없었다. 무심하고 굳은 인상으로 서있던 사람들은 차가 오면 쌩하니 제 갈 곳으로 떠날 뿐이다. 그중 누군가가 영등포 가는 버스는 길을 건너가야 된다고 일러주었으나 막상 버스 타는 곳으로 갔지만 몇 번 차를 타야 되는 지 또 난감했다.

이 사람 저 사람 살펴보다가 양복을 쪽 빼입고 하얀 구두를 신은 멋쟁이 신사가 눈에 들어와 그에게로 가까이 갔다. 양지는 마치 친척집에라도 가는 아이처럼 말을 걸었다.

“아저씨, 영등포 갈려면 몇 번을 타야 됩니꺼?”

양지가 말을 걸자 팔짱을 끼고 무슨 노랜가를 흥얼거리던 신사가 위를 훑어보며 물었다. 혼자 몸을 흔들거리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과 차고 반드러운 눈빛이 약간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마치 기다렸던 사람을 만난 듯이 양지의 물음에 대번 친절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여간 고맙지 않았다.

“영등포는 왜 가는데?”

순간 양지는 머뭇거렸다. 여드름쟁이 녀석을 따라 고모라고 해야 할지 그냥 아주머니라고 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헷갈렸다. 그러나 신사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선선하게 말했다.

“내가 마침 그 쪽을 가니까 같은 차를 타면 돼.”

양지는 순간 살았다 싶었다. 기억하고 있는 주소가 정확한지는 알 수 없지만 앞으로 나갈 방향이 생긴 안도감이다.

기다려도 차는 좀체 오지 않는 지 버스가 몇 대나 정차했다 떠났지만 신사는 차를 타지 않았다. 그 사이에 퍽 친절해진 신사는 양지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영등포에는 누가 있느냐를 비롯하여 배는 고프지 않느냐, 몇 시 기차를 탔었냐는 등. 그러나 양지는 못들은 척 하거나 다 말하지 않는 것으로 정처 없는 제 처지의 가리개로 얼버무렸다. 그러나 신사는 제 궁금증을 멈출 기미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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