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3 (423)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3 (423)
  • 경남일보
  • 승인 2017.06.19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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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3 (423)

공중화장실에서 노루잠으로 밤을 새운 양지는 다시 어린 몸 하나 깃들 틈 없는 유리벽 도시의 낯선 거리를 풍매화처럼 휘돌아야했다.

아무도 그녀를 모른다. 관심을 가지고 쳐다보는 이조차 없으니 그녀의 존재는 강가에 쌓인 모래보다 더 가치가 없고 아예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다. 어떻게든 뿌리 내릴 틈을 찾아야하는데 그녀가 말을 거는 순간 엊그제의 그 신사나 중국음식점에서와 같은 일이 벌어질까봐 이제는 먼저 말을 거는 것도 겁이 났다. 세상은 모두 그림이나 영상물처럼 그녀와 상관없지만 말을 거는 순간 깨어나는 악령과 같았다.

하염없이 걷다보니 숲과 친한 단아한 3층 건물 하나가 나타났다. 큰 건물인데도 음식점이거나 여타의 다른 상점처럼 복잡한 간판을 달고 있지도 않은 어쩐지 기품 있어 보이고 안정감 느껴지는 건물이다. 건물로 오르는 높은 층계를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책을 옆구리에 낀 청년 하나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 순간 문득, 주머닛돈을 꺼내서 여비로 보태주던 주인집 선생님의 여린 겨울 햇귀 같은 선심의 눈빛이 떠올랐다. 책을 많이 보는 사람만 소지하고 있는 눈빛이 따로 있을 것만 같은 믿음으로 용기를 냈다.

“아저씨 지 좀 도와 주이소.”

층계에서 내려서자 제 갈 길로 휙 몸을 돌리던 청년이 의혹어린 표정으로 멈춰 섰다.

“뭘 도와달라고?”

단정하고 순수한 상대방의 목소리는 예상대로였다. 양지는 예감이 맞아떨어진 기쁨으로 가슴이 마구 쿵쾅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막상 대답이 얼른 나오지 않았다.

“도와 달라고 했으면 말을 해야지. 너 시골서 올라왔니?”

양지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어 본 청년이 되묻자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양지는 고개를 숙였다. 아, 나는 남의 눈에 이렇게 빤히 다 보이는 아이구나. 정처 없는 아이의 비애대로 코끝도 찡해졌다.

“야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누구랑 같이 왔다가 헤어진 거야? 길을 잃은 거야?”

양지는 지난밤의 끔직한 봉변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 서러워졌으나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이제 영등포도 없다. 혈혈단신으로 기댈 곳은 책을 끼고 있는 이 선량한 청년뿐이라는 단정에 매달렸다.

“너 어디서 왔어? 경상도 어디? 부모는?”

청년의 관심어린 질문이 깊어지자 양지의 기지도 차츰 발동을 했다. 저도 몰래 깜찍한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경상도는 맞는데 부모는 없어 예.”

“저런.”

불쌍하고 딱한 한숨을 청년이 토해냈다. 청년의 눈빛은 이제까지 보아 온 사람들 누구와도 비교 안 되게 맑고 부드러웠으며 깊고 섬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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