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3 (425)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3 (425)
  • 경남일보
  • 승인 2017.06.19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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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3 (425)

양지는 시험공부에 집중하는 사람을 더 잡고 하소연할 면목도 없다. 밥을 얻어먹은 것도 감지덕진데 면목 없이 상대에 기대지 말고 또 제 길을 스스로 찾는 수밖에 없다.

양지는 밥 먹은 그릇을 주방으로 가져다 놓고 탁자 정리를 했다. 청년과 식당 주인과의 친분을 보면 여기서 비빌 언덕을 찾아봄직도 하지만 어제 일이 생각나서 식당에서 먹고 잘 생각은 아예 접어둔 채여서 말도 꺼내지 않았다.

“저 도련님과는 먼 친척인가?”

다행히 미적거리고 있는 양지에게로 주인의 호기심이 먼저 날아왔다. 청년과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는 손님처럼 점잖게 수발도 받았는데 저를 또 벌거벗긴 초라한 떠돌이 모습으로 세울 수 없어 양지는 엉겁결에 예, 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때를 못 맞춰왔네. 어디 고궁이라도 구경 시켜서 보내지 절대 그냥 보낼 사람이 아닌데. 오빠가 지금 눈코 뜰 새가 없어. 밥도 제 시간에 못 먹는 것 봐. 밤에는 잠도 안자고 꼬빡 새우지 아마.”

저를 청년의 친척으로 여기는 주인여자의 말을 듣고 있던 양지는 또 언뜻 어떤 기지의 일깨움에 눈을 떴다.

“오빠 방에 가서 온 김에 빨래라도 좀 해주고 가면 안돼예?”

그렇게 기특한 생각을. 안주인의 얼굴이 활짝 폈다.

“그렇게 기특한 생각을 하다니, 역시 그 집 핏줄은 다르네. 그 집 어른들도 돈 받고 밥해주는 나한테도 고맙다고 올 때마다 선물을 주고 가더니.”

식당 이층에 있는 청년의 방은 벽면을 둘러싼 많은 책으로 인해 일상용품은 간단했는데도 아주 좁고 단순했다. 그러나 손닿을 수 없이 높은 곳까지 첩첩 쌓여있는 책들은 부잣집 창고를 본 것처럼 양지를 압도했다.

이 방의 주인이 보인 이해와 따뜻한 배려는 마침내 저 많은 책의 갈피갈피에서 뽑아낸 인간애의 즙 아니겠는가. 양지는 아직 이렇게 많은 책 속에 묻혀 사는 사람을 본적 없었기 때문에 부러움이 더했다. 나도 공부를 하고 싶다는 잘렸던 욕망이 다시 샘솟아 올랐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도 이 방의 주인처럼 넓은 정보와 깊은 사려가 있었다면 고리타분한 사고에서 벗어나 딸자식일지언정 어떻게든 교육의 길을 열어주어 지금과 같은 처지로 내몰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나도 공부를 많이 하고 나면 여기 이 오빠처럼 불행하고 힘든 사람을 이해하고 도우는 힘을 얻게 되었을 텐데.

양지는 미처 치우지 못한 방을 비질과 걸레질로 말끔하게 청소했다. 내게도 저런 오빠가 있었으면 얼마나 든든하고 좋을까. 은인에게 보답하는 마음으로 쌓인 빨래도 챙겨내서 깨끗이 씻어 널었다. 할 일을 다 하고 나니 제 집 일을 끝마친 듯 개운하고 편안함이 느껴졌다. 쌓여있는 책 가운데 한 권을 펼쳐들고 벽에 기대앉았으나 무슨 내용인지 종잡을 수 없는 복잡한 구조 때문에 검은 글자만 빽빽한 책속으로 빠져들 여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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