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3 (426)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3 (426)
  • 경남일보
  • 승인 2017.06.19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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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3 (426)

억지로라도 몰입해 보려는 동안 여기가 어디이며 나는 지금 왜 여기 있는지. 처지도 잊은 노독이 혼곤하게 몰려와 그녀를 가라앉혔다.

갑자기 활짝 밝아지는 불빛에 놀라 눈을 뜨니 청년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푹 잤던 단잠 덕분에 머릿속도 맑았고 몸놀림도 개운했다.

“깼어? 내 빨래를 했다더니 피곤했구나. 어서 자거라.”

“아임더, 많이 잤어예.”

“나와 친척이랬다지? 너 참 맹랑하고 앙큼한 데가 있다. 잘 응용하면 이 담에 뭐가 돼도 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니? 내 눈에는 그렇게 보여.”

받침이 될 어떤 여건도 없으면서 양지는 이 방에 머무르는 몇 시간 동안 축적해 놓았던 제 열망의 문을 삽시간에 열어 젖혔다.

“저도 공부를 하고 싶어 예.”

“그렇지 사람은 배워야 하니까.”

양지는 초등학교 시절 꽤 똑똑했던 자신의 이력과 중학교를 보내 준다는 약속과 함께 남의 집 아이보기로 집을 떠났던 것을 술술 털어놓았다. 딱한 듯이 입을 쑥 내밀고 양지의 말을 듣고 있던 청년은 마른 입맛을 다시며 부수수하게 제 머리카락을 쓸어댔다.

숙식을 해결하면서 학교를 다닐 수 있는 데라……. 청년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혼잣소리를 흘리더니 책상 앞으로 갔다.

“우선 자거라.”

비좁은 공간을 염두에 둔 양지가 머뭇거렸지만 청년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책 위에다 얼굴을 고정시켰다. 양지는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우두커니 앉아 있으려니 저절로 청년의 뒷모습으로 눈길이 갔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청년은 책장을 넘기고 펜을 잡은 두 손만 꼬무락거릴 뿐 의자에서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같은 방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잊어버린 듯 몰아지경이었다. 깊은 밤, 고요만이 가득한 방에는 불빛만 살아있다.

잠자코 청년을 바라보고 있던 양지는 저도 몰래 심호흡을 삼키며 이불을 끌어당겨 제 입을 틀어막았다. 양지는 꺄아악,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환희를 제어했다. 책속에 몰입해 있는 청년의 전신에서 알 수 없는 빛이 발광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연예인들의 쇼를 보러갔는데 열창하는 그들의 공연에 열광해서 펄떡펄떡 뛰었던 감정이 딱 맞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아니 그보다 부처의 광배와 같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최선과 최고의 열정으로 자신을 투척했을 때 뿜어 나오는 인광은 관객을 열광시키는 연예인이나 부처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잠 잘 시간이 없으니까 내 걱정 말고 편히 누워서 자도 돼.”

말똥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양지가 뒤통수로도 보이는지 책장을 넘기면서 청년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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