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3 (427)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3 (427)
  • 경남일보
  • 승인 2017.06.19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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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3 (427)

청년의 공부에 방해 될까봐 양지는 소리 없이 자리에 누웠으나 쉽게 잠들지 못했다. 기차에 몸을 싣는 순간부터 세상에 연줄 없는 단 하나가 되었다.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로 나아갈수록 모래알 같은 외톨이 신세가 되자 차라리 매인데 없는 홀가분한 자유를 맛보기도 했다. 색다른 세계의 알 수 없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희망 속에 그녀는 나날이 변용의 내면을 키웠다. 저를 버리는 사람도 저이며 저를 구하는 사람도 저라는 말이 실감나는 날들이었다. 양지는 다시 한 번 청년에게 매달려보기로 했다.

어린 양지는 며칠 뒤 청년의 부탁을 받은 식당아주머니의 주선으로 산업체 학교가 있는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그 후로도 양지는 청년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외무고시에 합격한 청년이 외국으로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소식은 뜸해졌다. 때마다 고개 드는 고마움 때문에 양지가 전화를 하면 청년은 겸양의 목소리로 양지의 장한 도약과 발전을 치하했다. 전화를 끊고 나면 양지는 저도 누군가의 은인이 되어야한다는 다짐을 곱새기곤 했다. 지금도 만약 그 분과 연락이 된다면 훌륭한 멘토에게 자문을 구할 수도 있지만 어찌 된 셈인지 바뀐 전화번호로 인해 그와의 인연은 아름다운 추억 정도로 머물고만 상태다.

이제 어른이 된 양지는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을 가끔씩 음미할 때가 있다. 하지만 누가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일부러 돈까지 주고 사서할 것인가. 어림없는 일이다. 그러나 어린 양지가 체득했던 생의 비술은 그 고통을 이겨 냄으로 생성되어진 것들이다. 그의 인생을 통하여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이 되고 행복을 열어 줄 지혜의 바탕도 이 시기에 잉태된 것임을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로서 가난다는 것, 고통스럽다는 것은 피해야할 무서운 맹수나 원수 같은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성숙을 조달해주는 한 때의 온상 같다고나 할까. 그 과정에서 얻은 인지능력은 그의 인생을 관류하는 지주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양지는 그때 가장 광대하고 심원한 곳집 하나를 마련한 셈이었다. 어린 연치로 인해 그때는 객관적인 자평은 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해서 양지는 누군가의 보호자 노릇으로 자신이 넘겼던 그 위기의 징검다리 역할을 보상해야 된다는 소명을 키운 것이다. 오래 사귀었던 현태와의 결별을 감수하면서까지 지켜 낸 수연이 심저에 맺혀있던 그 결론의 대상이었는데 지금은 호남이 방치하고 있는 주영이까지 포함된다. 호남의 말대로라면 아이를 키울만한 여건을 갖출 때까지 참는 게 맞는 말이긴 하다. 그러나 자신에 비하면 주영은 아직 너무 어리다는 점으로 양지는 더 미루지 못하는 조급증에 시달렸다.

며칠 후, 첫 번째로 주영을 찾아갔던 양지는 빗나간 제 예감에 쓴 안도의 웃음을 지었다. 빈 논인 마을 앞 공터에 한 떼의 아이들이 깡통차기를 하고 놀며 와아와아 지껄여대고 있었다. 깡통을 서로 차기 위해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아이들 속에 주영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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