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대한민국]휴전 협정 반대, 1951. 진주의 여름
[증언:대한민국]휴전 협정 반대, 1951. 진주의 여름
  • 경남일보
  • 승인 2017.07.16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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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영(언론인, 진주문화예술재단 부이사장)
▲ 지난 5월 열린 논개제 의암별제 모습.
1953년 7월 27일. 장장 37개월 2일 동안 강토를 붉게 물들인 한국전쟁을 일시적으로 정지시킨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64년. 국제관례상 이토록 오랫동안 협정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한반도가 유일하다. ‘휴전’은 전쟁 중에 교전 당사국간의 합의로 전투를 정지하는 일이다. 적대행위는 일시적으로 정지되지만 전쟁상태는 계속된다. 따라서 잠정협정이기 때문에 전쟁상태를 종결시키는 평화협정과는 다르다.

휴전회담은 1951년 6월 1일 38선을 중심으로 전선이 고착되자 전쟁의 확전을 우려한 유엔이 “38도선 부근에서 휴전한다는 것은 유엔군의 참전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란 성명에 이어 16일 유엔 사무총장의 휴전 제의, 30일 유엔군 총사령관의 ‘한국전쟁 정전교섭에 관한 성명’에 대해 7월 1일 북한군과 중공군이 연명으로 이를 수락하면서 이뤄지게 되었다.

경남일보는 이를 7월 3일자 1면을 통해 ‘공산군 측 정전교섭 수락성명 발표, 회담 장소는 개성, 일시 10일부터 15일까지로 제한’ 제하의 보도와 ‘야수와 도의 양립하는 한 38정전설 안 된다’는 사설을 통해 휴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경계선 다시 두는 제안은 거부한다.’는 내용의 성명 등을 싣고 있다.

 
 


이어 7월 11일자는 ‘역사적 개성 정식회담 개최, 전투 정지 등 군사문제 토의, 1년간 전투에 종지부 찍으려나? 화전(和戰)의 분기(分岐)회담 귀추에 이목 집중’ 이란 제하에 “전 세계의 이목이 앞으로 1주일간 길어도 10일간 계속될 이 회담을 주시하고 있다.”며 회담에 관한 높은 관심을 전하고 있다.

이처럼 금방 답이 나올 것 같은 기대 속에 7월 8일 예비회담에 이은 10일 본회담 개최 이후 협정 체결 시까지 신문의 관련 보도가 숨 가쁘게 이어지는 가운데 159회의 본회담, 179회의 분과위원회 회담 등 모두 765회의 회담을 거치고서야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클라크와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가 서명함으로써 협정이 체결됐다.

협정문의 정식 명칭은 ‘유엔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으로 이름이 길다. 대한민국은 이 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다. 당시 이 대통령은 중공군 철수, 북한의 무장해제,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 등을 내세우며 휴전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길고도 질긴 회담이 시작된 1951년 진주의 여름은 휴전 반대의 기류 속에 타고 남은 잿가루만 날리는 촉석루와 끊어진 남강다리, 주요 건물이 무참하게 망가진 시가지는 깊은 상실감에 빠져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도 “진주라면 촉석루를 연상하고 촉석루라면 의기 논개 사당을 연상”하는데 “촉석루는 터만 남고 사당은 6.25와 풍우로 파괴된 것”을 진주는 물론 멀리 부산까지 모금한 돈으로 보수하고(6월 13일자, 의기 논개사당 20일 후 수축 완료), 전란 피해로 비봉루로 옮겼던 창렬사 33위를 진주시장이 절하며 다시 봉안했다(7월 18일자, 창렬 33위 어제 옛 사당으로 환봉). 그리고 “강물도 옛날대로 흘러가고 새로 임란(주:6.25)을 겪고 돌아온 사람들”이 거리거리로 나섰다. 삼장사와 논개 제향을 위한 제수 비용 가두모금에 나선 것이다.

신문 제목만 읽어도 넉넉히 짐작된다. 7월 18일, 19일, 22일 것만 보더라도‘의랑 거시(擧市) 사제, 가두 모성(募誠)에 호응하라’, ‘음 6월 29일 장사(壯士) 가인 (佳人) 향사’, ‘제물은 거집행(據集行)’, ‘한청(韓靑) 맹략’ 등의 제하에 대한청년단, 한청 여자청년부, 전 예기조합원, 일반 시민 등이 여러 날을 통해 모았다.

이에 사설은 8월 2일 ‘장사 의랑 오늘 향사’란 제목으로 “삼장사도 촉석도 다 가고…강수마저 마른다손 치더라도 혼이야 끝끝내 남을 지며 진양 사람이 떠나고 없을 리 만무하다”며 “거리에서 모아온 제찬을 차려놓고 한낮에 향초 밝혀 초혼 행사를 오늘에 이룩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춘풍추우(春風秋雨) 일제하에서도 숨어서 봉행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날 제향은 무너진 촉석루 터에서 오전엔 삼장사, 오후엔 논개 순서로 치러졌다.

한편 7월 31일에는 ‘적침(赤侵) 진양성 1주년 분기(憤起), 청년 학생 항공(抗共) 웅변대회’가 신문사 주최로 진주성에서 열렸다. “진양성이 놈들에게 짓밟힌 그날-솟구쳐 오르는 원수심에 살점이 떨리고 뼈저린 수난의 토막토막이 쓰라린 가슴에 더욱 조여든다.”며 ‘피침(被侵) 1주기, 상기하자 그날을’이란 구호로 직장단위 행사를 갖고 가무음주를 삼갔다는 데서 ‘휴전’의 의미를 다시 음미케 하는 것이다. 장일영 전문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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