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4 (443)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4 (443)
  • 경남일보
  • 승인 2017.07.04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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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4 (443)

되짚어보면 청맹과니처럼, 마이동풍 격으로 나잇살만 먹어치웠다는 자괴감이 망연자실하게 나를 짓눌렀다. 성장과 영역확장이라는 미망의 늪에서 끝없이 허우적거려 온 삶의 끝에서 확인하게 된 이 기갈스러운 혼미, 허탈.

야, 이년아 너도 나 되어 봐라.

나는 불현 듯 소리 지르며 온 몸을 뜬다. 허공에는 딸년, 그 도도한 다섯째 딸년의 눈초리가 박혀 있다. 아무리 흩어버리려 해도 경멸에 찬 딸년의 얼굴은 지워지지를 않는다. 보세요, 아버지의 친구도 뭐라고 했어요? 나는 두 눈을 꾹 감으며 고개를 저어 좀 전에 겪었던 일을 지웠다. 어깨 튼실한 아들자식이 있었다면 그 친구 째보도 날 그렇게 홀대하지는 않았겠지. 천만에요. 아버지의 뜬구름 잡는 삶의 방식을 나무랐지 아버지의 가난을 나무라지는 않았어요. 서울 딸한테 말하면 됐을 것이라고 그 아저씨도 아는 방법을 아버지는 왜 말 못하셨지요? 그건 아버지가 쳐놓은 울타리에 아버지가 갇힌 탓이죠. 아직도 남아있는 그 바늘귀 같은 자존심 때문에 말이죠. 아니 양심이라고 말해 드릴까요? 오늘 내가 당한 무안하고 한심한 지경을 들었다면 너는 또 눈도 깜짝 하지 않고 그렇게 대들었겠지.

기대를 했던 건 사실이다. 낯짝에다 쇠가죽을 뒤집어 쓴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잖다면 이 일이 어떤 일인데 언감생심 그런 마음을 낼 요량조차 할 수 있었을 것인가. 딸자식은 말짱 헛것이라는 복안을 집어 삼키고 호남이네를 더터 너한테까지 갔던 것이다. 남들 부녀간처럼 부녀간의 살뜰한 정이 단박 건너오리란 것을 바랐던 건 아니지만 요즘 세상에는 딸자식 덕 본다는 부모들이 하도 많기에 행여나 내 딸들도 그런 시대적인 영향으로 아비의 이런 곤고한 입장을 이해해 줄지 모른다고 넌지시 기대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뿌리지 않은 씨앗이 싹트고 열매 맺을 리는 만무했다. 가져 간 사연을 꺼내 볼 염도 못하게 딸년의 반응은 남보다 더 멀고 싸늘했다. 원측대로 뜻대로 끌고 나가면 언젠가는 일이 제대로 풀릴 줄 알았지 내 신세가 끝까지 이렇게 뒤틀릴 줄은 몰랐다. 생각할수록 발등을 찧고 싶었다. 노여움 찬 한기가 전신에다 소름을 끼얹었다. 저들한테 베푼 것도 없는 부모가 무얼 바래는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지만 가슴 벌렁거리는 노여움을 갈앉히는 데는 많은 힘이 든다.

자식들이나 마누라한테는 평소에 해놓은 공이 없으니 그렇다하더라도 안면을 믿고 이해하며 제법 도타운 우정을 쌓아 놓았다고 믿었던 친구까지 서운하게 하는 데는 내가 정말 세상을 그렇게 헛살았던가 싶은 절망감이 덮쳐왔다. 되새기기도 싫은 좀 전의 상황들이 활동사진마냥 눈앞으로 펼쳐진다.

이리 와서 술이나 한잔하자니까. 내가 부탁한 건에 대한 대답은 가타부타 답이 없이 째보는 자꾸 그 소리만 했다. 손에 든 술잔을 너울렁거리며 손짓만 하는 째보를 보자 기대는 무너져 내렸다. 얼마나 조바심치며 기다렸던 대답인데 겨우 술이나 한 잔. 단번에 거절하기 어려운 부탁을 받았을 때의 완곡한 거절이 그런 것쯤 모르는 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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