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융희의 디카시로 여는 아침] 비와 연정
비가 내리면
그대의 시간에 잔잔히 흩어지고 싶다.
이슬 같은 빛 머금고
머무르기 위해 뿌려지는 잔재들
나는 그대의 시간 속으로 달려가는 빗방울이다
-류인자(시인)
‘비가 아무리 줄기차게 쏟아진다 하여도 우산 속에서 나란히 걸을 수 있다면 사랑은 시작된 것입니다.’ 용혜원 시의 부분이다. 하늘이 흐려지는 순간 비는 허공을 긋고 소리로 먼저 내리는 것 같다. 나에게 다가오는 그대의 발자국 소리 같기도 하고 창을 두드리는 그대의 잔잔한 목소리 같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비 오는 날이면 접혀있던 우산을 펼치고 거리로 나서보면 어떨까. 어깨를 맞대고 빗소리보다 더 나지막하게 서로의 이름을 불러보면 어떨까.
비 오는 날이면 굳게 닫혀 있던 서랍을 열어 오래 간직한 이름을 호명해 보기도 한다. 매몰된 세월을 들춰 그리움을 때론 여문 상처를 더듬어 보는 것이다. 끝내 고개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태워버린 일기장을 아쉬워 해보는 그런 날이다./ 천융희 《시와경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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