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4 (444)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4 (444)
  • 경남일보
  • 승인 2017.07.04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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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4 (444)

농주가 타작마당으로 배달되는 것을 보면서 감돌았던 군침이 일시에 사약 맛으로 변했다. 그것은 이미 거래의 상대에서 제외된 완곡한 표현이었다. 이제 누구를 또 찾아가나. 현금 천오백만 원. 눈앞이 캄캄했다. 어디로든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릴 수는 없을까, 나는 간절한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쓰러질 것 같은 몸을 배릿한 냄새를 풍기며 짚단더미가 몸을 받쳤다. 아늑한 감이 언제까지나 그대로 기대앉아 있고 싶었다. 그러나 오래 죽치고 앉았을수록 궁상스러움만 더할 뿐이다. 하지만 잡초가 짓밟힌 논바닥에다 못 박힌 듯 보내고 있던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부끄러움과 섭한 마음으로 볼 따귀가 욱죄어 들었다. 설마 했던 미련은 어디까지나 나 혼자의 잘못된 계산이었다.

못들은 척하고 있으면 다시 뜻을 전달하기 위해 가까이로 오는 동안 저와 내가 과거에 쌓았던 정의를 생각해서라도 혹시 마음을 고쳐먹지 않을까. 거머쥐고 있던 이 일말의 기대는 어떻게 하나. 이런 참담한 기분을 맛보기 위해 농기구 수리소로 시장으로 바쁘다는 사람을 장시간 기다리다가 사정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것은 아니었는데.

나는 모로 기댄 채 실눈을 뜨고 친구의 다음 거동을 살폈다. 어린 시절, 다른 친구들은 코찔찔이네 오줌싸개네 하고 놀려대도 나만은 째보를 두둔하며 감싸주었다. 그 역시 나이 든 지금까지 옛날 그 시절의 고마움을 뇌이며 내 친구는 자네밖에 없다고 농익은 곡주처럼 치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의 결론은 너무나 참담하다. 내가 미심쩍으면 딸년의 이름으로 된 든든한 차용증은 물론이고 원한다면 고리로 이자를 달래도 줌세. 달려가서 손을 잡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눈길이라도 한 번 더 이쪽으로 돌려주기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는 나를 째보는 깨끗이 잊고 있는 기색이었다. 콤바인 기사의 술잔에다 술을 부어 권하고 안주를 챙겨주느라 여념 없는 태평스러운 행동은 이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어려울 때 보호자처럼 감싸주던 다정한 옛 친구이며 저도 형편 되면 언젠가 무엇으로든 한 번은 은공을 표시할 거라던 옛말도 싹 지워버리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연기를 내고 있는 담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젖은 땅에다 쑤셔박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와, 술도 한잔 안하고. 그 놈 째보가 그러더라. 내가 간 목적이 어디 술 한 잔 얻어먹으러 간 거냐.

비칠비칠 힘없어지는 걸음을 몇 행보 길 쪽으로 떼어 놓은 뒤에야 영문 모르게 까탈 부리는 친구를 나무라듯 째보가 그러더라. 나는 응, 하며 피할 곳 없는 시선을 먼데로 돌렸다. 눈길을 마주치면, 행패를 부려서 될 일이 아닌 줄 알면서도 네가 이럴 수 있느냐고 멱살이라도 잡을 것 같았다.

미안하이. 자식 놈한테 살림을 넘기고 난 게 이럴 때 후회스럽네. 나중에 말은 그렇게 하더라만 나는 제 놈 처지가 나 같으면 그리는 안한다. 나는 놈의 핑계를 안다. 여차 즉선 한 친구의 부탁인데 꼭 한 번 들어주자고 언제 아들을 설득해 보기나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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