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4 (445)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4 (445)
  • 경남일보
  • 승인 2017.07.04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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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4 (445)

그들 부자는 서로에게 불리할 때 공깃돌 주고받듯이 서로에 대한 방패막이 구실을 참 훌륭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공판장으로 실어낼 볏가마니를 부지런히 경운기에 싣고 있는 아들 곁으로 한 번 가는 걸 본적도 없는데 말이다.

오해는 말게. 추곡매상은 하고 있지만 농약 값이야 인건비야 나갈게 워낙 많아야지. 나야 그림에 떡이지 용돈 한 푼이 아쉽네. 그라고 농촌 돈에 기천이 뉘집 아 이름도 아이고. 딸들이 출가외인인데 그 많은 돈을 떠맡아서 갚아주겠나. 차라리 맨땅에 헤딩을 해서 핏덩이 에미랑 쇼부를 내는 게 좋을 상 싶네.

지 까짓게 뭐이관데. 주제넘게 그런 해결 방안까지 귀띔을 하나. 그 순간 나는 나도 몰래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내가 오늘 당한 이 수모를 들으면 이 눈, 이 눈이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느냐고 네 에미도 아마 분개할 것이다.

씨족 마을 아이들의 텃세 싸움은 늘 그렇게 너무나 시시하고 하찮게 시작되었다. 지금 와서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조차 한 오라기 건덕지도 떠올릴 수 없는 그저 매일 그렇듯이 힘없는 아이를 골려주는 습관 된 희롱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본인인 째보도 고통스러워했다. 이제는 나잇살이나 먹은 대접을 해달란 것이었다. 이 너무도 당연한 요구는 묵살되고 참혹한 모습으로 주눅이 든 째보를 보다 못해 결국 내가 나서게 되고 말았다.

세 불리하면 나도 물러서야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그날은 운이 나빴다. 하필이면 무슨 일로 네 에미가 그 동네의 길을 가다가 이런 모양을 보고 있었다. 나는 젊은 아내가 보는 앞에서 시시하게 물러 설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아내 앞에서 째보를 때리던 놈의 코피나 한 번 시원하게 터뜨려놓고 손 털며 나설 작정이었는데 한 놈 두 놈 곁붙어 드는 놈이 늘었다. 그 동네 일족인 송가네 젊은 것들이 연락을 받고 모두 몰려 나와 겁도 없이 설치는 놈에게 뽄대를 보여주자며 죄 엉켜들었던 것이다.

외롭고 가난한 주제에도 뻣뻣하게 구는 나의 기를 꺾어 놓을 좋은 기회를 벼르고 있던 그물에 걸려들고 만 것을 모르고 있었던 거다. 어느 순간 약속이나 한 듯이 몇 놈이 달려들더니 내 팔과 다리를 둘러메고는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가더니 들판 가운데 있는 둠벙에다 던져버리는 거였다. 낭패한 듯이 보고 서 있는 아내 때문에 나는 그냥 당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물 섶으로 간신히 기어오른 나는 가까운데서 웃고 있는 송가 한 놈을 멱살잡이로 끌어당겨 다리를 걸고 쓰러뜨려서는 주먹으로 면상을 내려치는 한편 발로 차고 으깨고 끝장이라도 낼 양으로 굴었다. 최선의 방어는 최악의 공격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먹이를 탐하는 승냥이 떼처럼 몰려 든 송가 패거리들에게 나는 다시 일방적인 먹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놈의 면상을 향해 잽싸게 박치기를 날렸는데 내 얼굴을 후려치는 불방망이 같은 강한 충격 때문에 미처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얼굴을 감싸며 꼬꾸라졌다. 네 이놈들, 당장 물러섰거라. 나잇살 느껴지는 어떤 음성이 싸움판을 헤집고 뛰어드는 것이 어렴풋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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