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4 (447)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4 (447)
  • 경남일보
  • 승인 2017.07.04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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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4 (447)

편지를 다 읽은 양지는 멍하니 그냥 앉아있었다. 참 괴이한 생각이 들었다. 지난 일이라선지 편지의 내용에 대한 거부감이 일지 않는 것도 그랬지만 아버지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기도 했다. 아버지는 절손의 두려움 때문에 나댔을 테지만 양지의 눈에는 바람을 피우기 위한 한 수컷 사내의 변명이라고 냉소했는데 말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어머니가 옛날에 했던 끔찍한 장면도 떠올랐다. 그날도 어머니는 용하다는 점쟁이 집에서 돌아올 때 비방으로 쓰일 흰장닭 한 마리를 들고 왔다. 새끼줄로 칭칭 묶은 장닭을 들고 점쟁이가 시키는 대로 삼거리에 도착한 어머니는 하늘의 햇살이 빤히 내려다보는 환한 대낮이라는 것도 아랑곳없이 시퍼런 칼로 단번에 댕강 닭모가지를 잘라버리는 거였다. 모가지 잘린 닭의 몸뚱이에서 날개가 퍼득일 때마다 분수처럼 시뻘건 피가 포물선을 그리며 터져 나왔다. 온 길거리에 이리저리 흩뿌려진 피는 행운으로 돌아올지 저주로 돌아올지 헤아리기 어려운 요상한 부적처럼 그려졌다. 그 후에도 어머니는 수태에 좋은 거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집요하고 끈질기게 비방을 실행했다.

자손이란, 사람 뿐 아니라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종족 번식은 본능일 것이다. 그 점을 인정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양지는 제 스스로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귀하게 존중 받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항상 그녀를 조종했다.

양지는 지난 가을 아버지가 득남했다는 호남의 전화로 상심해 있던 날 읽었던 누군가의 글을 떠올렸다. 제목도 저자도 확인 절차 없이 눈에 띄는 대로 메모해둔 내용이었다.

밑줄 친 부분이 있을 만큼 기억은 또렷했다.

―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잘 사는 이유는 성씨의 숫자가 훨씬 많은 것과 이 나라 여성들의 고유의상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애가 수두룩하니 아이를 만든 장소로 성씨 작명한 것을 두고 양반의식에 젖어있는 우리 선조들은 불상놈들이라고 이들을 비하했다. 싸우면 매번 지면서도 말이다. 혈통중심의 순혈주의가 얼마나 배타적이고 폐쇄적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는 개방성과 역동성이 떨어지고 다양성과 다원성의 세계관도 잃어버린 결과와도 연관된다. 여자의 정조를 따져서 열녀비 따위로 도덕적 기준을 삼는 폐쇄성의 나라, 이런 문화 속에서는 진취성과 상상성과 창조력까지 짓뭉개질 수밖에 없었다. 도덕의 타락을 개탄하며 남자들 자신의 무능으로 끌려갔던 공녀들을 환향녀로 멸시했던 비겁하고 오만했던 그들 양반의 인심.

남녀의 성을 자유롭게 생산적 에너지로 확장시킨 일본에 비해 조선은 남녀칠세부동석 따위의 엄격한 도덕률과 불필요한 정조의식만 강요했으니 창조적 생산적 에너지를 가로막은 우를 범했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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