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4 (449)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4 (449)
  • 경남일보
  • 승인 2017.07.04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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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4 (449)

“것도 다 지 사주팔자지. 지 명이 그 뿐이모 방안에 가만히 앉아서도 죽는 답디다. 저런 여자들은 그래도 지 할 것 다해보고 죽어서 원도 한도 없지. 북극 얼음판에 떨어져 죽어도 좋으니 나도 그렇게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

“옛끼 순 남으 일이라꼬 그리 함부로 말 하모 안 되지. 아니 할 말로 눈 감아 바린 저야 모르지만 살아있는 가족들은 우짤끼고. 남편이고 아아는?”

“아아들이 쪼맨 안됐기는 하다만 남자야 새 장가 들면 나이 젊겠다 얼매든지 살지.”

“그래도 전사만 하겄나.”

그들 김 순화의 행복과 슬픔을 싹 지운 텔레비전 화면은 이내 우스꽝스럽고 난만한 개그 프로그램으로 돌아가 있었다. 허무감에 빠진 채 꼼짝없이 앉아있는 양지의 귓가에는 무심하게 나누던 두 사람의 말들이 예사롭지 않은 앵앵거림으로 남아있다. 정아의 전화로 그쪽 이야기를 들은 게 며칠 전이라 더욱 그랬다.

얼마 전 정아가 제가 키우던 개에게 물린 파상풍으로 입원했을 때도 문병 온 친구들의 중심 화제는 온통 순화의 집 일이었다고 했다. 순화의 시어머니가 시장 간 사이에 집을 나온 큰아이를 이튿날 파출소에서 찾은 일이며 작은애가 폐렴에 걸렸으나 아내에게 부담을 줄까봐 알리지 않았다는 순화 남편의 마음 씀은 독신녀들의 입에서 부러움과 찬탄이 터져 나오게 했다는 등.

양지는 목석처럼 굳어진 채 앉아 있었다. 순화네 가족, 그들의 행복했던 모습은 이제 꺼져버린 화면처럼 속절없이 사라져버렸다. 한 사람의 성장과 발전을 도운다는 명분으로 가족들이 안아야 되는 고독과 이별의 아픔은 이제 어떻게 보상을 받아야 하나. 언젠가 그 인내와 배려를 말하며 행복을 꽃피우는 날까지 어떤 불상사든 그 가족들을 해쳐서는 안 되는 데 말이다. 천지신명도 그들을 도와야하고 자연도 문명도 그들을 도와야한다. 하지만 달리는 야생마처럼 거침없이 당차던 한 여자가 없어진 자리의 어둡고 깊은 수렁은 그들 남은 가족이 안간힘 써서 복원하려는 오붓함마저 넘보면서 절망의 암흑 속으로 자꾸 끌어들이려 할 것이다.

집에서 애나 잘 키우지. 양지는 힘주어서 식은 찻잔을 움켜쥐었다. 누가 뭐라든지 그들의 행복과 불행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집에만 있다고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건만 사람들은 제 하기 쉬운 말로 남의 불행을 평하기 좋아한다. 별난 아내나 엄마로 인해서 입게 되는 가족들의 불행? 아니다, 아니다. 양지는 고개를 저었다. 거울의 양면처럼 어떤 일에나 비평과 호평은 짝꿍처럼 따라 다니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양면이다.

이 땅의 딸들. 정말로 생각이나 각오는 대단하고 대단했을 것이다. 양지 자신부터 이럴 건 아닌 각오로 그악스럽게 살았다. 그렇지만 이게 뭔가. 세상은 원형의 끝없는 변형과 변주의 반복으로 진행되고 있을 뿐인데 너무 큰 꿈의 세계를 상정해놓고 그 것의 환영에 이끌려서 필요 없이 먼 길을 에돌아 다닌다. 저항과 음모까지도 흉내 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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