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4 (450)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4 (450)
  • 경남일보
  • 승인 2017.07.04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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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4 (450)

갑자기 당한 충격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다음 행동도 떠올리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있는 양지의 머릿속에는 아버지의 이죽거림이 미늘이 되어 다시 떠올랐다.

“ 부를 많이 했음사 값을 해야제, 일자무식인 니 에미보다 나은 게 뭐꼬. 네 동생 호냄이년도 저렇고, 세상 모두가 네 년들 겉음사 사람 씨종자 하나 남것나.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 혼자 해놓는 기 표 나는 기 뭐이 있노. 지 아무리 일등 일등만 해도 일등은 또 다음 일등한테 눌리고 최고 최고만 해도 그 최고는 또 다음 최고한테 눌리고 밀리게 돼 있다.”

주영의 주검을 한 줌 재로 날려 버리고 돌아왔던 날도 아버지는 얼큰하게 취한 김에 솔직하고 미련스럽게 양지를 설득했다. 이제 그만 결혼해서 한 살이라도 더 늦기 전에 아이를 낳아 이 세상에 나왔던 가장 확실한 표를 하라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주장이 수 천 년 내려오면서 검증되고 확인된 진실인지 모른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양지는 모멸스러운 자리를 피하는 것으로 불편한 심기를 대신했을 뿐 긍정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겉으로 드러내서 반발하지 않은 것은 지난겨울에 겪었던 많은 일들이 가르쳐주었던 교훈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또 양지를 설득하다 못해 이런 편지까지 넘겨주고 갔다.

다 읽은 편지를 봉투에다 접어 넣은 양지는 어릿어릿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산대에서 셈을 하고 밖으로 나와 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허둥지둥했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떤 절박한 현실이 그녀를 안절부절 못하게 했다. 몸을 지탱한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안 돼. 이대로 이렇게 주저앉아서는 안 돼. 그녀는 마른땀이 밴 얼굴을 들어 누군가 자신을 부축해 줄 사람을 찾았지만 캄캄해진 망막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누구, 누구, 나 좀 도와주세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짜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아무도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 아득한 소음의 바다 속으로 그녀는 허청허청 걸어 들어갔다. 마음만 앞서서 순화의 문상을 가고 있었다.



앙칼스럽고 절박하게 우짖는 강아지 소리에 문득 눈이 떠졌다. 눈을 뜨자 골이 띵해지면서 머릿속이 흔들려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양지는 눈을 다시 감았다. 밖은 이미 환하게 밝아있었다. 몇 시나 되어서 잠이 들었던 것일까. 얼마나 마셨던 것일까. 얼른 정리가 되지 않는다. 빛이 반사되는 방향으로 보아 마시다 취한 채 그대로 쓰러져서 잠이 들었음이 분명하다. 소파 밑에 머리가 들어가 있는지 한 쪽 손끝에 만져지는 것이 레자소파의 한 모서리인 것을 알 것 같다. 남들이 보았다면 어젯밤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을 것이다. 노처녀들의 해괴망측한 술주정과 회한에 찬 고백….

“몽골아, 쉿!쉿!”

양지가 기척을 보이며 제 이름을 부르자 몽골이 쪼르르 양지에게로 뛰어왔다가 다시 아까의 자리로 돌아가서 낑낑거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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