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4 (451)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4 (451)
  • 경남일보
  • 승인 2017.07.04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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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4 (451)

“이 애는 어디로 갔나?”

양지는 지난밤의 술판이 그대로인 방안을 둘러보며 정아의 기척을 탐색했다. 방으로 잠자리를 옮겼을까? 기특하게도 어디 해장국거리라도 사러갔나? 수초 귀를 기울였지만 화장실 기척도 감지되지 않아 양지는 우선 안방으로 가보았다. 그때, 바람을 탄 인쇄물 몇 장이 펄렁거리면서 거실바닥으로 날아 앉는 것이 보였다. 마감을 몇 차례나 어겼지만 아직도 못 넘겼다던 정아의 번역원고였다. 책상 대용으로 쓰는 다탁 저쪽으로 열려있는 창이 보였다.

프린트 물을 건성 눈으로 훑어보던 양지는 갑자기 싱그러운 바람이 그리워져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켜 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때였다. 빠른 손놀림으로 누군가가 벨을 누르면서 외치는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이봐요, 이봐요, 이 집에 누구 없어요? 문 좀 열어보세요!”

부스스한 차림을 살필 겨를도 없이 문을 열었던 양지는 몇 사람의 얼굴을 동시에 묶고 있는 급박한 긴장감을 읽었다.

“어서 좀 나와 보세요!”

그들은 응답할 사이도 없이 양지의 손을 끌다시피 승강기로 향했다. 하강하는 동안 주민들이 말했다. 한 여자가 투신을 했는데 이 집 사람 같다고 경비가 그런다. 나도 알아, 몇 번 봤으니까. 그런 증언의 소리들이 어리벙벙한 양지의 고막으로 꽂혀들었다. 투신, 이라는 말은 양지의 감각을 거의 마비시킬 지경이었다.

아, 그게 그런 거였구나. 양지는 어제 저녁 정아가 술과 안주거리를 챙기는 동안 낙서된 그녀의 심경을 읽은 터였다. 번역 본 속에 있는 문장을 짚어 본 것이려니 여기며 건성으로 훑어보았던 독신자의 자기 고백에 찬 내용들.



* 혼자가 너무 편해서.

* 새로운 가족을 만들면 그들과 어울리는 동안 겪게 될 갈등과 화해에 대한 번거로움 때문에.

* 타인과 스칠 때의 이물감이 너무 싫어서.

* 관계 맺은 가족에게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와 강박감의 기피.

* 무엇보다 자신이 사는 집과 정한 그 자리에 모든 물건이 그대로 있어야하는데 그게 흩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 아주 근본적인 이유는 이 모든 걸 뒤엎을만한 남자가 없기 때문이다.

* 휴일도 없고 퇴직도 없는 직장, 주부는 피곤하다.

* 배울 권리, 알 권리, 주장할 권리, 여자도 사람이다.

* 제 자식의 양육도 남의 손에 맡기면서 기를 쓰고 직장 생활을 하는 여성들.

* 할머니, 어머니 보다 많이 배우고 똑똑하다는 여자들이 이 풍요하고 성성한 문화의 텃밭에서 해 놓은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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