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벼락
강천 (수필가 경상남도 문인협회 사무차장)
물벼락
강천 (수필가 경상남도 문인협회 사무차장)
  • 경남일보
  • 승인 2017.08.03 17: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천
멀건 대낮에 수각황망한 물벼락을 맞았다. 사무실 앞 커피 자판기 관리원이 나에게 내린, 때아닌 구정물 세례였다.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어떤 일에 휘말리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비록 우발적인 일이었다 하더라도 가해자나 피해자나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오늘 나에게 물벼락을 내린 어르신의 황당한 표정이 딱 그 모양이다. 길거리 자판기를 청소하면서 받아낸 허드렛물을 무심코 버린 것일 뿐인데, 하필이면 그 시간에 내가 곁을 지나간 우연의 산물이었다. 그러니 다소 부주의한 탓이 있다 하더라도, 가해자 격인 사람의 억울한 심정을 헤아리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럼, 피해자인 나는 어쩌란 말인가. 길을 가면서 물벼락 맞을 채비를 하고 다니는 사람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어르신을 보니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얼마 전 내가 저지른 실수를 수습하느라 마음 졸였던 생각이 겹쳐서였다. 소속 인원이 육백 명 가까운 단체의 연락책을 맡고 있다 보니 ‘사흘이 멀다’고 경조사나 다른 일로 소식을 전할 일이 생긴다. 회원 집안의 부고를 메일로 보내는 날이었다. 한꺼번에 보낼 수가 없어 몇 번으로 나누어 보내다가, 어느 부분에서 엉뚱하게도 건강하게 잘 계시는 회원을 죽은 사람으로 둔갑시켜 메일을 발송하고 말았다. 즉각 알아차리기는 했지만, 이미 발송된 단체 메일이라 취소할 길도 마땅찮아 눈앞이 캄캄해 왔다. 부랴부랴 사과문을 보내고 사태를 수습하느라 진땀을 뺐던 내 모습을 누가 봤다면 꼭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가만히 있다가 불시에 사망선고를 받은 회원에게 아무리 전화를 시도해도 통화 중이라는 신호음만 들리니 애간장이 탔다. 이미 소식을 전달받고 있을지도 몰라서 더욱 안절부절못할밖에. 자그마한 실수도 아닌 무려 본인의 사망 소식이니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통화가 되었다. “아이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다짜고짜 들이미는 말에도 이미 이해하고 있었던 듯, “아, 네. 방금 누가 알려줘서 들었어요. 오늘 좋은 일이 있으려나 보네요.”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점잖은 중년 여인의 목소리였다.

거기에 비하면 이깟 물벼락쯤이 무슨 대수일까. 아랫도리가 아니라 머리에 구정물이 쏟아졌으면 또 어쩔 뻔했겠는가. 덕분에 잠깐이나마 더위를 잊었었으니 그것으로 된 것이지. 허허.

강천 (수필가 경상남도 문인협회 사무차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