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다. 막걸리 한 잔 먹고 싶은 날. 무심히 지나쳤던 세월들처럼 평범하기만 했던 하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특별할 것도 없었던 하루. 그 하루의 끝에서 막걸리가 먹고 싶어졌다.
오전엔 비가 내렸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였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에 몸도 마음도 지쳐있는 상태였다. 바닷물의 수온이 섭씨 28도까지 올라갔다는 뉴스가 방송에서 흘러 나왔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시원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도심은 태양에 불타고 있었다.
아침나절까지만 해도 빗줄기는 제법 굵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비가 반가웠다. 빗속으로 팔을 쭉 뻗었다. 피부에 와 닿는 감촉이 시원하다. 빗방울이 뜸해 졌을 때는 우산을 받지 않고 빗속을 걷기도 했다. 옷이 젖는다고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에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마당 설거지를 하던 옛날이 떠오른다. 초가지붕 짚을 따라 빗물이 내리고 어머니는 화덕에 불을 피워 부침개를 부쳐 주었다.
오후엔 문자 한 통이 날라 왔다.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내용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참 얌전하던 친구였는데. 큰 슬픔을 어찌 견뎌낼 수 있을까. 마음이 착잡했다. 거리가 멀어 조문은 가지 못하고 부의금만 전달했다.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하늘엔 구름이 조금 있었다. 구름사이로 햇살이 보인다. 저 구름 너머 어딘가에 어머님이 계실까. 허공으로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막걸리가 먹고 싶어졌다. 퇴근시간이 가까워 오자 막걸리가 먹고 싶다는 욕망은 더 강해졌다. 가슴 한 구석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 욕망은 온 몸을 휘감더니 곧 정신까지 지배했다. 온통 막걸리 생각뿐이어서 이제는 막걸리를 먹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퇴근을 하자마자 동네 분식집에 가서 2천 원짜리 부침개를 샀다. 단골슈퍼에 가서 천육백 원을 주고 우리 쌀로 만든 막걸리도 한 병 샀다. 슈퍼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가게 앞에 앉아 막걸리를 마셨다. 텁텁했다. 막걸리를 먹고 싶다는 욕망은 해결했지만 허전한 마음은 달래지지 않는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거리를 지나간다.
이동우 (수필가, 한국언론재단 부산지사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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