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대한민국] 전장을 헤맨 청춘들
[증언:대한민국] 전장을 헤맨 청춘들
  • 경남일보
  • 승인 2017.08.15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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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영(언론인, 진주문화예술재단 부이사장)

“이른 아침 들판에 나가/일하는 농부에게 물어 보라//공산주의가 무엇이며/자본주의가 무엇인지/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지리산 싸움에서 죽은 군경이나 빨치산에게 물어 보라/공산주의를 위해 죽었다/민주주의를 위해 죽었다 할 사람이/과연 몇이나 있겠는가//그들은 왜 죽었는지/영문도 모른다고 할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6.25 전쟁 때 지리산 공비 토벌대장(서남지구 전투경찰대 제2연대장)이었던 차일혁 총경이 ‘이 땅의 평화를 기원하며’라며 발표한 시의 앞부분이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훨씬 지난 지금껏 한반도의 전운(戰雲)은 걷히지 않고 있다.

그는 당시 지리산에서 준동하는 빨치산의 근거지를 없애기 위해 화엄사 천은사 쌍계사 등의 소각명령을 받고도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 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며 천년 고찰과 그 문화재를 전화(戰火)에서 구한 인물이다. 그의 부대는 또 1953년 9월 지리산 화개 빗점골에서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앞의 시구처럼 ‘왜 죽었는지 영문도 모른…’ 청춘들이 산중을 헤매다 죽은 빨치산은 1948년 여수·순천 10.19사건 등의 반란군으로 쫓겨 산으로 들어간 선(先)빨치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과 낙동강 전선에서 패퇴한 북한군 낙오병과 산으로 간 부역자들인 후(後)빨치로 구분하기도 한다.

1953년 9월 지리산 화개 빗점골에서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한 차일혁 총경. 사진출처=국가보훈처
▲ 경남일보-1951-07-26-01-002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덕유산 가야산 등 험준한 산악지대에 거점을 두고 군경의 보급로 차단, 식량 약탈, 지서 습격, 통신망 절단, 차량 기습, 살인·방화와 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하여 지리산 일대는 낮엔 대한민국, 밤엔 인민공화국으로 낮과 밤의 세상이 달리 연출되었다.

국군은 이런 공비 소탕을 위해 군경 합동으로 1950년 10월부터 1953년까지 집중적인 토벌을 했으나 발본되지 않아 1956년에 이르러서야 대부분 소탕했으나 1963년 11월 12일 최후의 빨치산 이홍희를 사살하고 정순덕을 생포함으로써 종지부를 찍었다. 이에 따른 지리산지구 토벌전 교전횟수만도 1만717회, 전몰군경은 6333명에 이른다. 싸우다 죽고, 굶어서 죽고, 얼어 죽은 빨치산 측은 근거가 없지만 줄잡아 1만 수천 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처절함은 세계 유격전 사상 드문 일로 북한정권에 의해서도 외면당한 채 남한 산중에서 메아리 없는 절규만 했을 뿐이다.

이런 토벌전과 전황은 종군기자들의 생사를 넘나든 투혼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경남일보도 특파원이란 이름으로 전선으로 보냈다. 당시 종군기자단에는 경남에서 경남일보와 부산일보 남원지국 기자가 편성됐다. 그 한 예로 51년 7월 22일자 1면엔 ‘본보 윤 기자 토비선(討匪線) 특파’란 1단 기사로 “지리산 주변의 잔비준동의 단말마적 발악상과 용전분투하는 특공대의 소탕작전을 실사하고 공비지역 주민의 애처로운 정상을 파악…”하기 위해 윤기원 기자가 출발했다고 알리고 있다.

윤 기자는 ‘가야산에 공비 5백, 입체전으로 격투 중’ 제하에 “…항공대에서 폭격기 출격, 해인사 부근 폭격 중…”(7.24)임을 보내온 데 이어 ‘사명당 중창비와 팔만대장경 위태화, 범종소리 그윽한 가야산곡 풍운급(風雲急), 해인사 점비중(占匪中)…’이란 제하에 합천지역 전황과 민심 동향을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7.26) 이어 ‘거창공비 3백여 명 양민 학살’(7.27), 백운 덕유 장암 공비 1천5백여 명 아군과 교전 중…’(7.28) 등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을 누비는 투혼으로 급박한 전황을 전하고 있다. 그날 신문은 ‘제3차 진주 침공 기도’도 싣고 있다.

 

▲ 경남일보-1951-09-05-01-002
▲ 6.25 전쟁 당시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거부함으로서 문화재를 지킨 김영환대령

 


그때 폭격기 편대를 이끈 편대장은 공군 창군 멤버이자 빨간마후라를 창안한 김영환 대령이었다. 그는 수뇌부로부터 공비 소탕을 위해 해인사 폭격명령을 받았지만 “…인민군 수백 명을 살려 보내더라도 민족의 소중한 문화재인 팔만대장경을 폭격할 수 없다”고 항명하며 오늘의 세계 문화유산과 기록유산인 장경판전과 고려대장경을 살려낸 인물이다.

경남일보는 뒤에도 강한규, 김대규, 강효진, 김성조, 노대식 기자 등을 합천, 거창, 함양, 하동, 남원 등지로 특파하여 토벌작전의 전황을 알리며 민심을 계도했다.

같은 해 9월 5일자 ‘소위 이현상 부대 일부 구례로, 전 주력은 다시 삼장면에 회집(回集)’과 같은 달 8일자 ‘이현상 지휘설, 2주야 격전 후 마천서(馬川署)를 실함(失陷)’ 등에서 ‘빨치산의 신화’로 불린 이현상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다. 그도 결국 한 줌의 재가 되어 섬진강으로 흘러들었는데, 막내딸 이상진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 시, 만수당 의사당을 직접 안내했다고 전해진다.

우리 현대사의 처절했던 비극의 현장, 지리산과 가야산은 지금 거대한 침묵으로 우뚝하고, 해인사와 화엄사 등의 민족 문화재를 전화에서 구한 김영환과 차일혁은 절 아래 각각의 빗돌과 더불어 영원히 살아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경남일보-1951-09-08-0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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