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4 (471)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4 (471)
  • 경남일보
  • 승인 2017.07.04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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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4 (471)

양지는 평소에 대하던 오빠가 아닌 다른 사람처럼 오빠에게 대거리를 했다.

“아녜요. 부탁하겠는데 오빠도 아버지도 다시는 이런 일로 저 괴롭히지 마이소. 저는 이미 제 운명을 봤십니더. 지리산 스님이 그러시데요. 버리면 더 큰 것을 담을 그릇이 된다고.”

단호하게 선언하는 양지의 모습을 놀란 소처럼 커진 눈으로 바라보던 오빠도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담긴 마른 입맛만 쩝쩝 다셨다. 달리 무슨 위로의 말이 필요하랴.

머쓱해진 얼굴로 굳이 지금 할 필요 없는 목장 이야기를 이것저것 조금 나누다가 오빠가 돌아간 뒤 양지는 둥두렷한 목장 언덕에 우두커니 혼자 앉아 하늘을 보았다. 훈풍에 실린 달빛이 백사 너울처럼 하늘하늘 일렁거렸다. 찢어진 감나무 가지 사이로 달빛이 산란하듯이 너무 많이 흔들리는 대로 본능이거니 방치했던 감이 없잖았다.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다른 하나를 버려야함에도 집토끼도 산토끼도 같이 소유하고 싶던 욕심의 그릇을 같이 끌어안고 있었으니 자괴감은 빤한 결과였다. 하지만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쥐고 있던 귀한 보석을 앗긴 애석함을 지울 수 없었다. 쏟아 부었던 마음을 쓸어 담는 자존의 아픔이 더 쓰라렸다. 아무도 없는 곳이라 눈물은 더 뜨거웠다. 자아올린 두 줄기 눈물이 끊이지 않고 흘러 내렸지만 양지는 닦지 않았다.

맨발로 걸어 온 내 세상의 기로가 바로 여기다. 여기서 나는 넓은 길이든 좁은 길이든 나만의 길을 선택하여 다시 나가야한다. 그러나 무작정, 남들처럼 걸어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주지해야 한다. 어머니가 자신을 희생해서 우리를 지켜 낸 것으로 생명의 값을 다하고 멸해 갔듯이 아버지가 아프기 싫은 자기의 삶에 푹 찌들어 살았듯이 나도 나름의 분명한 내 삶, 내 목숨의 값을 가치 높은 것으로 취택해서 결정지어야 한다. 자기의 운명은 자기가 만든다는 말처럼 나는 나니까 당연히 내 운명을 만들어야 한다. 남들의 눈에는 비록 하찮게 보일지라도 내 운명의 무게에 등가적 동행을 해야 된다. 한 인간을 위해 우주전체가 도는 것 같은 때가 있는데 간절히 원하면 한 번 쯤 나를 위해서도 우주가 움직여 줄 것으로 믿는다. 일상의 연결 속에서 과거가 이루어졌고 현재가 조금씩 축을 형성해 가듯이 미래도 그런 여망의 근실함이 뚜렷한 성과를 보여줄 것이다. 개인이 살아가는 방법이나 이치는 열 살 이전에 다 체득된다고 한다. 이미 불혹의 접점에 가까운 나, 이제 그만, 여기 이곳 내 자리에서 똑 소리 나는 시작을 하자. 남녀가 결혼을 하는 것은 개미허리처럼 잘록하게 심신이 약해졌을 때, 소소한 재미로 묘하게 장치된 흉계에 걸려드는 것과 같다.

양지는 이참에 우먼파워 시절의 경구 하나까지 되새김한 뒤 눈물로 막힌 코를 팽, 풀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팔을 활개 치듯 크게 흔들면서 저쪽에서 비치는 불빛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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