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위식의 기행(96) 지리산 대원사 계곡
윤위식의 기행(96) 지리산 대원사 계곡
  • 경남일보
  • 승인 2017.08.21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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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사전경.

 

태초의 자태를 오롯이 간직한 청정계곡들이 야금야금 개발되며 생활오폐수의 유입으로 날로 오염되고 있어 옛 명성만 믿고 계곡물로 들어갔다는 낭패 보기가 일쑤인데 국립공원 지리산의 유명계곡들이 그나마 이름값을 하고 있어 대원사계곡으로 찾아 들었다.

대원사계곡의 들머리는 산청군의 삼장면에서 산청읍으로 이어지는 59번 국도의 명상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고부터이다. 평촌마을 건너편의 다랭이논 한 가운데에 훤칠한 높이에 튼실한 탑신의 경남도 유형문화재 31호인 신라시대의 석탑이 천년세월을 지키며 홀로 섰지만 석가세존의 사리탑인줄은 아는 이도 많지 않거니와 찾는 이가 없어 언제나 쓸쓸하고, 발끝 아래로 철분으로 붉게 물든 크고 작은 바윗돌이 물소리와 어우러진 장장 10여㎞의 대원사계곡이 장관으로 이어진다.

옛 매표소와 인접한 벽송식당은 산채별미로 오가는 산객들의 주막집이고 예서부터 수림이 울창한 본격적인 비경이 세속을 두고 법계로 인도한다. 모롱이를 돌아 석조난간을 멋스럽게 다듬은 대원교에 닿으면 계곡의 풍광이 오가는 이들의 발목을 잡는다. 고산준봉들이 하늘을 조여서 천공은 손바닥만 한데 몸집이 미끈미끈한 노거수의 홍송(紅松)은 범속의 소나무와는 그 기품을 달리하며 촘촘히도 빼곡하고 널따란 계곡에는 세월에 모가 닳은 거암거석들의 틈새사이로 은구슬 옥구슬을 방울방울 튕기면서 청정옥수가 콸콸거리고 흐른다.

범속도 하나며 시공도 하나이요 일체중심도 오직 하나인 일주문을 들어서면 길은 굽이져 이어지는데 널따란 계곡은 길 따라 물 따라 오로지 하나 되어 나란하게 굽이돈다.

포장된 길은 ‘새재’로 향하여 이어지고 왼편 언덕배기로 오르는 커다란 자연석의 층층계단위로 우뚝한 문루에는 ‘방장산 대원사’라는 편액이 붙었다.

충남 예산의 덕숭산 수덕사와 울주군의 가지산 석남사와 함께 삼대비구니승의 수도처이자 나라에 경사가 있으면 보물 제1112호인 탑전에서 서광이 비치고 향내가 경내를 진동한다는 전설까지 품고 있는 영험한 도량이라서 일까, 청정에 몰입되어 정갈하기 그지없고 고요함의 절정에서 시공이 정지된 고즈넉한 심산절집 방장산 대원사는 낭랑한 비구니의 독경소리와 심산계곡으로 여울지는 둔탁한 듯 청아한 목탁소리가 그치지를 않는다. 커다란 돌확의 식수대 곁에 고령거목의 은행나무 아래의 기다란 의자에 걸터앉으면 세속의 묻은 때가 씻기어지는 듯이 머릿속까지 맑아진다.

대웅전과 원통보전이 석축위에 나란한데 사면팔작지붕의 원통보전은 목조건축미의 극치를 이룬다고 하면 과장일까, 채양을 사면으로 펼친 임금님의 가마인 연이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일까, 연방이라도 가마꾼이 성큼 들어 올릴 것 같은 날렵한 멋이 속객의 넋을 뺀다. 관음보살 좌상 앞에 무릎 끓고 독경하는 젊디젊은 비구니의 뒷모습이 장상 입은 어깨가 야위고 좁아서 가련함이 묻어나고, 목탁을 거머쥔 하얀 손이 너무 작아 안쓰럽고 측은한데 삭발머리 파리하여 서러움이 젖어오고, 독경소리 낙랑해도 연약하고 가늘어서 마디마디 한스럽다. 앳되고 여린 몸에 먹장삼을 걸치지 않으면 안 되었을 사연은 무엇일까, 세속을 멀리한 법계의 선택일까 전생의 업보일까, 불단위의 향로에선 향불의 연기만이 실오라기 같이 하늘거리며 피어오른다.

돌아서서 계곡을 따라 발길을 옮겼다. 나뭇잎 비비대는 소리는 바람의 소작이고 콸콸거리는 계곡물소리는 바윗돌의 소작이다. 활엽수림은 하늘을 가리고 비탈지고 굽은 길은 끝없이 이어지는데 발끝 아래의 계곡은 크고 작은 바윗돌이 빈틈없이 자리를 잡았다. 널따란 반석마다 깊이를 알 수 없이 층층으로 이어지는 청옥 빛의 맑은 소(沼)는 청량감을 더하는데 웅장한 바위는 서로를 마주보며 군웅처럼 당당하다. 크고 작은 바윗돌이 얼기설기 뒤엉켜서 모래 한 줌 흙 한 줌 없는 청정한 맑은 물에 도란도란 다정한데 유평마을에 닿으면 예닐곱 집의 작은 마을은 모두가 식당이고 저마다 토종백숙이며 산채비빔밥에 도토리묵과 동동주로 산객들을 기다리고 가운데로는 가랑잎국민학교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세를 띠던 유평초등학교가 오래전에 폐교되어 산골아이들이 뛰놀던 옛 영화를 못 잊어서 추억 속에 처량하다.

 

출렁다리


피서인파가 북새통을 이루다 밀물처럼 빠져나간 8월 하순의 대원사계곡은 그림 같은 풍광 속에 산새만이 지저귀고, 바람소리 물소리는 고요함을 더하는데 뼈아픈 민족상잔의 비극의 소용돌이에서 빨치산토벌작전으로 피아의 유혈이 낭자했던 계곡! 총탄의 자국들이 역사의 상처로 남겨진 바위들! 멸공통일을 절규하며 쓰러져 간 용사들! 구국의 선혈이 핏빛으로 물든 산하(山河)! 원한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한 심산의 한숨소릴까, 나뭇잎 스치는 바람소리가 괴괴한 계곡으로 스산하게 여울져간다.

잊지 말아야 할 잊어져가는 역사의 발자국을 자분자분 되밟으며 하늘을 덮어버린 수림의 터널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네댓 집의 작은 마을 삼거리가 나온다. 토종벌이 멸종되자 양봉으로 대체하여 대물림 받아서 ‘새재 꿀’의 명성을 이으려고 옹고집쟁이 이상진 옹의 부자는 토종에 버금가는 양질의 꿀을 얻고자 세월의 시계를 멈춘 채로 ‘감로꿀’까지 받아내고 있다.

아래위로 계곡의 풍광이 시원스럽게 트인 다리위에 서면 속객도 신선이 되어 천왕봉 넘나드는 구름을 탄듯한데 포장이 잘 된 가파른 경사를 거듭하며 굽이돌아 오르면 산새만이 넘을 수 있대서 ‘새재’라는 준령의 발치에 하늘아래 첫 동네인 작은 마을 ‘새재마을’이 있다. 피리 찜과 민물잡어탕으로 산객들의 명소가 되어버린 ‘산꾼들의 쉼터’ 민박식당 앞으로 여남은 대의 승용차를 주차할 수 있는 말쑥한 주차장이 해발 750고지의 막다른 찻길이다. 띄엄띄엄 숲속에 앉은 네댓 채의 펜션은 북적거리던 피서객이 떠나 휑하니 비어버린 평상들만 마당을 지키는데 새재 곶감의 장인 대화펜션의 권영희씨는 여기서는 계곡물을 마음껏 마셔도 좋다고 일러준다.

산새도 숨을 죽인 고요함의 심산에 개암 알을 깨는 뜻한 목탁소리가 있어 찾아들었더니 대웅전은 중수 중이고 꽤나 널따란 마당을 깔고 요사채가 정갈한데, 마당 가장자라에 목조정자를 지어 커피포터와 커피며 녹차를 마련해 놓고 오가는 이들이면 누구나 드시라고 보시의 장을 마련해 놓은 조계종 직할사찰 ‘조사선 도장’의 ‘불조사’ 주지 정대스님은 독경삼매로 여념이 없다.

천왕봉 8.8㎞라고 일러주는 등산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을 따라 오솔 길로 잠시 접어들면 이내 ‘무제치기폭포’와 ‘치밭목 산장’을 거쳐 천왕봉으로 오르는 등산길의 초입에 출렁다리가 나온다. 집채 같은 바윗돌의 틈새마다 폭포수가 쏟아지는 그림 같은 비경위에 계곡을 가로지른 높다란 출렁다리를 건너는 산객들은 백의민족의 영산인 성모천왕의 품으로 오늘도 줄줄이 발길을 이어간다.

/윤위식·수필가(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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