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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경남일보 공동기획] 천년도시 진주의 향기<2>임진왜란과 진주대첩
최창민  |  cchangmin@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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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9.11  02:4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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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성벽에 대나무사다리를 걸치고 기어오르는 왜군을 격퇴하고 있는 진주대첩 기록화. 사진제공=전쟁기념관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 4월 13일, 왜장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대륙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야욕으로 충복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필두로 15만8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와 한반도를 침탈한 침략전쟁이다. 그들의 명분 이른바 정명가도(征明假道)는 ‘명을 침략할 것이니 조선은 길목을 트라’는 통보였다. 이는 처음부터 어그러진 어처구니없는 전쟁임의 방증이었다.

그들은 신무기 조총(鳥銃)으로 무장했고 조선은 내부 분열로 대비가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부산포까지 무혈 입성했다. 수일동안 안택선(安宅船)에서 둥둥 떠다닌 그들은 그토록 원하는 흙냄새를 맡자 미친 듯 내륙 깊숙이 내달렸다. 조선 관군은 밀려오는 왜구 앞에 상대가 되지 못하고 패퇴의 수모를 겪어야했다. 불과 보름 만에 한강 방어선이 무너졌다. 20일 만에 한성이 점령됐으며 2개월 만에 평양성이 함락됐다. 함경도까지 진출한 왜군은 조선 땅에 대한 도륙(屠戮)과 민가에 대한 방화·분탕질을 서슴지 않았다. 더욱이 이들은 찬란했던 천년역사의 문화재 약탈을 감행, 반달리즘(문화유산, 예술품을 파괴 훼손하는 행위)행태를 보이면서 그야말로 전 국토를 유린했다.

조선의 이러한 고난은 여름, 가을, 겨울을 넘어 새해가 돼서야 풀릴 기미를 보였다. 1593년 1월 9일, 조명연합군의 평양성수복을 계기로 조선군은 반격에 나섰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4만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군과 연합해 평양성에서 맞닥뜨려 일본군을 제압했다. 제4차 평양성 전투이다.

이후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의 수군, 유정(劉挺)의 10만 군 등 22만 명이 파병돼 조명연합작전을 펼쳐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역습에 놀란 왜군은 남쪽 해안 끝까지 밀렸고 경상도의 진해 웅천, 울산, 울주 등 연안 30여 곳에 왜성을 쌓고 버텼다. 전쟁은 1593년 7월 진주성 2차전투를 기점으로 소강국면에 들어 1595년 1월~2월 사이 현재 창원 진해구의 웅천왜성에서 왜·명간 강화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교섭은 불발됐고 1597년 1월 14일 왜군은 14만15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재침한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이듬해인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11월 19일 남해 노량해전을 끝으로 이순신 장군이 전사했다. 왜군은 25일 부산에 모여 철수를 결정하고 꽁지를 내빼 7년간의 지루한 전쟁이 끝났다. 징비록(懲毖錄)왕조실록은 당시 전장의 비극을 적치여산(積置如山, 시체가 쌓인 모습이 산과 같다)으로 표현했다.

 
   
▲ 징비록 류성룡이 전쟁이 끝난 뒤파직되어 고향 안동하회에서 쓴책이다. 임란당시 최고위직에 있던 인사가 쓴 기록이어서 당시 역사를 이해하는 귀중한자료이다.사진제공=한국국학진흥원제공(개인)


△진주대첩(晉州大捷)은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두 차례의 싸움을 말한다. 한산·행주와 함께 임란 3대 대첩으로 불린다. 흔히 1, 2차전투로 나눈다.

-1차 진주성 전투는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1554~1592)장군이 맡는다. 1592년 10월 5일 가토 미츠야스(加藤光泰) 병력 1000명 등 3만여 명 왜군이 말티고개를 넘어 진주성으로 몰려왔다. 김 장군은 곤양군수 이광악 병력 등 3800여명이 성 안을 지키고 성 밖에선 민간인과 의병이 규합,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돼 결사 항전했다. 조총엔 활과 대기전으로 맞섰고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군을 향해 바위를 굴리고 끓는 물을 부었다. 위장술로 병사가 많다는 것을 보여줬고 효율적인 무기사용으로 전력손실을 막았다.

마산포 경상우병사 류숭인은 병력 1000여명과 함께 진주성 수성에 합세했으나 김 장군은 성문개폐에 따른 창졸(미처 어찌할 사이 없이 매우 급작스러움)우려 때문에 성문을 열지 않았다. 또 김 장군은 정(正)3품, 류숭인은 계급이 높은 종(從) 2품이어서 그의 입성은 주장이 바뀌는 결과를 초래해 작전의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었던 상황. 할 수 없이 류숭인은 역시 입성하지 못한 사천현감 정득열, 거제 가배량권관 주대청 등 400여명의 증원병을 통합지휘하며 전투를 벌였다. 이들은 결사항전으로 다수의 왜군을 죽이는 큰 공을 세웠으나 모두 전사했다.

가장 큰 손실은 진주대첩을 이끈 김시민장군의 죽음이었다. 그는 전투 마지막 날 새벽 동문 쪽 북격대(北隔臺)에서 전투를 지휘하다 왜군의 총탄을 맞았다. 죽기직전 친동생 김시약에게 ‘죽음을 알리지 말 것’과 ‘군중 통솔과 인심을 진정 시킬 것’을 당부했다.

6일간의 처절한 접전 끝에 왜장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가 이끄는 왜군은 심각한 전력손실을 입어 10월 10일 패주했다. 김 장군은 11월 22일 39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난공불락 진주성 요새는 그렇게 굳건히 지켜졌다.

남강과 주변의 지형을 이용해 축성된 진주성은 공략하기 어려운 성채(城砦)였다. 성문을 굳게 닫고 왜병에 쉽게 응대하지 않는 폐쇄적인 방어전술이 효과를 발휘했다. 특히 의병장 곽재우, 정유경, 김준민 등 군소 의병군들이 외곽에서 지원해 심리적인 우위를 점하면서 승리요인이 됐다. 이 승리는 경상도의 방어와 동시에 왜군의 호남진출 의지를 꺾어놓는 역할을 했다.

 
   
▲ 진주성 1,2차 전투에서 순절한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해 1987년에 세워진 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에 새겨진 전투장면.


-2차 진주성 전투는 참패한 왜군의 권토중래(捲土重來)였다. 1차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도요토미는 1593년 6월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진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면 살아 돌아오지 말라”는 극언과 함께 ‘성 토벌, 전라·경상도 정복’을 특명했다. 진주성을 점령함으로써 경상도를 열고 곡창지대 호남을 바탕으로 재 북상의지를 노골화한 것이다.

왜군 9만3000명은 6월 15∼18일까지 함안 반성 의령을 거쳐 19일 진주성을 공격했다. 당시 진주성에는 진주목사 서예원 휘하의 군사와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사천현감 장윤, 거제현령 김준민, 순천 의병장 강희열, 김해부사 이종인 등이 포진해 있었다.

진주성을 수성할 병사는 일반인 6만명을 제외한 조선관군 3000명, 의병 2800명을 합쳐 5800명이 왜군 9만3000명에 대항했다. 1차전투 1대 8을 능가하는 1대17이었다.

6월 21일 전투의 서막이 열렸다. 북쪽은 가토 기요마사가, 서쪽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군병이 포진했다. 하루 밤낮으로 3∼4회씩 8박 9일 동안 24회의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관군은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성밖에 토대를 높게 쌓은 뒤 조총을 쏘면서 공격해와 관군의 사상자가 늘어났다. 설상가상 전투 9일째 되는 날 폭우가 쏟아졌다. 마지막 전투 6월 29일, 동쪽 성벽이 예상치 못한 폭우로 허물어졌다. 왜군은 이틈을 놓치지 않고 밀물처럼 기어 올라왔다. 이종인이 일시 저지하며 악전고투했으나 철옹성 진주성은 정오께 함락된다.

경상우도 병사 최경회, 창의사 김천일, 충청도 병사 황진 병력과 황진 이종인, 김천일, 김준민 등 일반인 포함 7만여 명이 분전했지만 왜군을 막지못했다.

왜군은 도요토미 말대로 성안에 남은 군·관·민 6만 명을 사창(司倉)의 창고에 몰아넣고 불태워 학살했고 가축도 모두 도살했다. 울분을 참지 못한 최경회 병사 등은 남강에 투신, 순국했다. 왜군은 진주에서만 재물 30여척을 약탈, 남강에서 배에 싣고 떠났다.

그래서 패전으로 기억하는 전쟁, 실제는 그렇지 않다. 25회 전투에서 24회 승리했으며 왜군은 이 전투로 인해 전력 3분의 1에 해당하는 3만8000명이 죽었다. 왜군은 이를 계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부 학자들은 2차전투도 사실상 조선이 승리한 전쟁이라고 입을 모은다.

1, 2차 진주성전투와 정유재란 때 진주권에서 수 천 명이 포로로 잡혀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일본에는 이들이 모여사는 ‘진주도(晉州島)’마을까지 만들어졌다. 잡혀간 사람들 중 훗날 일본 본묘사(本妙寺) 주지가 된 하동의 여대남, 혹부리 글씨체로 유명한 홍호연, 진주선비 조완벽, 와카야마 유학의 비조(鼻祖)이자 이진영, 하천주, 김사준, 하종남 등이 있다.

진주대첩과 7만명이 순국한 진주성전투의 선양, 현창사업은 미약하다.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민·관·군이 목숨 바친 진주성대첩에는 그 흔한 대첩탑, 순국탑, 의총이 하나 없다. 충절의 고장이란 말을 무색케 하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 임진년 왜군으로부터 진주성을 지켜낸 ‘임진대첩(壬辰大捷, 1592년 1차 진주성전투)’과 그 다음해 성이 함락된 ‘계사순의(癸巳殉義, 1593년 2차 진주성전투)’때 순절한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해 1987 진주성 안에 세워진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단’.



<진주성전투 개요>

◇1차전투
-기간:1592년 10월 6일∼11일(6일간)
-병력:조선관군 3800명, 왜군 3만명(8배 규모)
-전투횟수:10회, 조선관군 전승
-사망:조선관군 800명, 왜군 1만명

◇2차전투
-기간:1593년 6월 21일∼29일(9일간)
-병력:조선관군 5800명(관군3000명, 의병 2800명), 왜군 9만3000명(17배 규모)
-전투횟수: 25회, 조선관군 24회 승리·왜군 1회 승리
-사망:조선관군 및 민간인 전원, 왜군 3만8000명(왜군병력 3분의 1)
출처: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란 이야기·박희봉교수 논형(論衡)

이수기 고문
필자 약력
진주사범학교
경남일보 전 편집국장, 현 논설고문

진주문화원 전 향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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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 사진제공=일본 나고야성 박물관소장품 진주국립박물관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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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총통. 사진제공=진주국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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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년만에 진주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대장군전
대장군전은 임진왜란 당시 사용됐던 무기이다. 일본군 수군장수였던 구키요시타카가 수집해 본국에 가져간 뒤 후손들이 대대로 보관해온 것이다. 이 문화재는 일본사가현 가라쓰시에 기탁돼 있다. 임란 당시 사용한 대장군전으로는 실물로 남아 있는 유일한 무화재이다. 420년만에 돌아온 셈이다. 사진제공=일본 가라쓰시 기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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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부터 천자총통, 조선 총통중 가장 큰 것 화포로서 천자는 천자문 첫번재 글자로 1번을 뜻한다. 지자총통은 두번째 글자로 2번째 크기, 현자총통은 세번째 글자로 작은 포를 의미한다.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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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대첩에서 사용된 것으로 확인된 비격진천뢰. 진주성에서 출토됐다.
사진제공=국립진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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