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5 (481)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5 (481)
  • 경남일보
  • 승인 2017.09.04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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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5 (481)

그런데 귀남은 그게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외국 생활을 한 다른 입양인들처럼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을 걱정했던 양지와 호남의 예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귀남은 양지와 호남을 처음 본 순간 껴안으려는 그들의 손을 뿌리치면서 등을 보이고 돌아서 버렸다. 그리고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오열을 혼자 쏟아놓았다.

수십 년 넘게 쌓였던 정한이 주체할 수 없는 격정을 일으킨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쌓이고 쌓인 그리움이면 능히 그런 행동으로 앵돌아질 수 있을 것까지.

이 모습을 지켜보는 양지나 호남도 공연한 죄책감으로 몸 둘 바를 몰랐다. 사랑을 받았네 못 받았네 불평하는 것도 같이 사는 자식들의 배부른 투정이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는 정경이었다. 그녀를 달래서 마무리 하는 동안 방송이 지연되는 사태가 빚어지기는 해도 혈육을 향한 농도 짙은 그리움이 격랑을 일으킨 때문이라고 모두들 수긍했다.

인간의 패악이, 가녀린 여자의 몸이 만들어 내는 독기가 얼마나 끈질기고 악랄한 것인지 그때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험하고 궂은 일에 관한 한 또래의 여자들에 비해서 어지간히 많은 경험을 했던 양지였지만 귀남의 귀국과 함께 겪어야 했던 고난은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것들이었다.

그때 호남이가 만약 귀남의 뺨따귀를 내갈기지만 않았다면 어땠을까. 양지는 자주 약자가 받은 충격의 시말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는 샘물도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된다는 말을 믿어야할까, 씁쓸한 결론 앞에서 머리를 내젓곤 했다.

가족이며 자매라는 이름의 얼굴들 앞에서 귀남이가 좀 과격한 투정으로 그리움을 발산했더라도 호남이 그렇게 과민반응을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돌이키기 어려운 지경까지 귀남의 증세가 과격해지지 않았을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이혼을 했고 주영이 마저 저 세상으로 보냈지만 성격대로 호방하게 살고 있는 호남은 무서운 것이 없다. 언니가 아니라 아버지라도 경우에 어긋난다 싶으면 못 참는 성격대로 귀남의 나이답잖은 응석과 찍자를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것이다.

호남을 향한 귀남의 뒤틀린 성격이 처음부터 발현된 것은 아니었다. 귀국해서 형제를 찾았다고 해서 곧장 정체성 회복이 다 되는 것도 아닐 터여서 귀남은 늘 우울하고 쓸쓸한 안색으로 방을 지키기만 했다.

정에 굶주렸던 사람의 그늘진 모습이거니 양지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종종 호남의 식당으로 귀남을 데려갔다. 세 자매가 마주 앉아 허심탄회하고 다정한 시간을 만들다보면 앞으로 살아갈 밝은 방향도 찾아지려니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주 앉으면 호남이 운영하는 가게의 특성상 자연스럽게 한잔 두 잔 술을 마시게 됐고 술 때문에 지난날의 한을 곱씹는 귀남의 한탄은 알코올 도수와 비례해서 나날이 드높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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